서양 정치사상사/플라톤
플라톤의 삶
+/-플라톤은 427년 저명한 아테네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페리치온은 아테네의 위대한 법률가 솔론의 후손이었다.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의 전통에 따르면 플라톤은 원래 시인이 되려고 했다. 그는 아테네 극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극을 썼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났을 때 자신이 썼던 극을 불태웠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게 오랫동안 끼친 영향은 대화편에서 분명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오래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입에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넣었다. 플라톤의 시적 재능은 그의 대화편에서 명백하다.
플라톤의 삶은 아테네의 쇠퇴기와 일치했다. 그의 탄생은 아테네의 권력과 영향력의 절정을 알린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의 젊음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아테네 군에서 복무했을 것이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아테네 민주주의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과두정치로 대체되었다. 제7서신에서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그가 점차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을 묘사한다.
고르기아스
+/-문학적 장치로서 대화의 매력은 저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아이디어를 고려할 수 있게 하고, 대화의 가장 "소크라테스적"인 플라톤은 이것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아마도 380년경에 쓰여졌을 것이다. 유명한 웅변가 고르기아스로부터 그 제목을 따왔다.
고르기아스는 상류층 젊은이들에게 성공하도록 가르치는 교사로 자신을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가 어떤 특별한 기술을 팔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철학과 수사학의 본질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철학은 배관이나 자동차 정비와 같은 특별한 것에 관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그 실무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고르기아스는 철학보다는 수사학의 교사이다. 만약 그가 의학이나 목공과 같은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면, 천문학과 같은 과학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어떤 수사학이 지식에 대한 지식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고르기아스와의 토론이 끝날 때,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은 전혀 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용한 목적을 제공하지 않으며 인간의 존재를 돕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