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는 중세 중국의 대송 제국의 문관이자 사학자인 시내암이 만든 소설이다. 본래 수호지는 대송 제국의 역사서에 기반하여 출발하게 되었으나, 시내암은 본래의 대송 제국의 역사서에 재미있는 내용들을 덧붙여 만든 소설로 탄생시킨다. 수호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 중 하나라고 불릴 만큼 매우 유명하다. 다음은 수호지에 대한 줄거리를 소개한 문서이다.

일탈의 군상(群像)들 +/-

어지러워지는 세상 +/-

대송 제국 말기 중원의 대륙에서는 알 수 없는 폭풍이 몰아쳤다. 당시 대천황은 인종 대천황의 뒤를 이은 철종이었고, 현재의 카이펑 광역시(開封 廣域市)인 둥징(東京) 카이펑부(開封府) 선무군(宣武軍)에 한 떠돌이 건달이 있었다. 성은 고(高)에 두 번째로 내질러진 자식이란 뜻의 이(二)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다. 고이는 어릴 적부터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오직 창쓰기와 몽둥이질이며 공차기에만 미쳐 보냈다. 특히 공차는 솜씨가 뛰어나서 사람들은 그를 고이란 이름 대신 고구(高毬)라고 부를 정도였다. 구(毬)란 가죽 껍질에 깃털과 터럭을 채운 당시의 공이었다. 고이 역시 그 이름이 싫지는 않았던지, 나중에는 제 스스로 터럭 모(毛) 대신 사람 인(人)변을 써서 구(俅)란 이름을 썼다. 아무튼 고구는 창쓰기와 몽둥이질 뿐만 아니라, 씨름과 노름에다 피리불기와 금(琴) 뜯기 따위의 모든 잡기(雜技)에 능했다. 그러다 보니 시서(詩書)와 사부(詞賦)를 전혀 알 리 없었고, 인의(仁義)와 예지(禮智)도 닦을 겨를이 없었다. 거기다가 생업조차 익히지 않았으니, 고구가 살아가는 길은 그저 남을 등치거나 개평을 뜯거나 구전을 얻어먹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고구에게 어느 날 우연찮게 걸린 봉이 성 안에서 철물점을 하는 왕원외()의 외아들을 알게 된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자 고구도 자신의 처지를 알아챘다. 그러나 도리 없는 일이었고, 고구는 말없이 짐을 꾸려 소소학사네 하인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더니, 그게 바로 뒷날의 출셋길로 접어드는 첫 발걸음이 될 줄은 고구도 몰랐을 것이다.

소왕도태위(小王都太尉)는 바로 철종 대천황의 매부요, 과거 신종 대천황의 사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소왕도태위는 자신의 생일날이 다가오자 부중에서 잔치를 차리고 처남인 단대천왕(端大天王)을 초청했다. 단대천왕은 신종 대천황의 11번째 아들이었고, 철종의 남동생이었다.

고구는 왕궁 뒤뜰 모퉁이에서 한 동안 그런 단대천왕이 대신들 5명 정도와 공을 차는 모습을 지켜봤다. 공차기라면 장안에서도 알아주는 그라 두 발이 근질거렸으나, 감히 함부로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 억지로 참으며 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고구가 마치 입신출세를 할 길이 열리느라 그랬던 것인지, 누군가 단대천왕에게로 찬 공을 단대천왕이 받지 못해 그 공이 빗나가 놀랍게도 고구의 몸 곁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고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익은 솜씨를 펼치는데, 원앙괴()란 공차기의 재주를 펼쳐 그 공을 단대천왕에게로 차 보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굽히며 두 무릎을 같이 모아 원앙괴로 법에 맞게 받아 차서, 그 공을 도로 단대천왕 앞으로 공을 보낸다. 비록 순간적인 일이었으나, 단대천왕은 이를 보고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기뻐하며 고구에게로 다가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사가촌(史家村) +/-

떠나는 구문룡 +/-

또 다른 일탈자 +/-

쫓기다 들게 된 불문(佛門) +/-

문수원(文殊院)에서 내쫓기는 노지심 +/-

야승(野僧)과 산 도둑과 +/-

다시 만난 구문룡과 노지심 +/-

대상국사(大相國寺)의 채마밭지기 +/-

표범대가리 임충 +/-

뒤틀려 버린 삶 +/-

창주(滄州)로 가는 길 +/-

소선풍 시진 +/-

말먹이 풀을 지키게 된 임충 +/-

임충도 일탈의 길로 +/-

양산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