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개론 제1장 심리학의 이해(초창기 심리학의 이해)

심리학 탄생 이전

인간심리에 대한 관심은 과장하면 철학의 시작과 같이한다. 마음에 대한 관심은 철학의 3가지 대주제인 인식론과 연관되어 수천년 동안 철학에서 다뤄져 왔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그리스철학의 두 거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음에 관심이 많았다. 이 두 학자는 각자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식을 타고난다는 생득설(플라톤)과 인간이 빈 백지에서 출발해 경험을 통해 지식을 쌓아나간다는 경험론(아리스토텔레스)을 주장했는데, 이 두 주장은 현대까지 형태만 바꿔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현대심리학의 큰 주제중 하나이다.[1]


이데아의 창시자 플라톤은 인간이 내면의 진리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우리는 감각으로 무언가를 경험하자마자 우리의 감각 경험과 우리 마음 속의 개념을 비교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앞에 놓인 빵을 보면 우리가 본 빵의 모습,냄새,촉감(감각경험)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빵의 형상,관련 기억,지식(개념, 심리학에서는 이를 표상이라 한다.)을 비교하여 이것이 빵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감각경험과 표상을 같다고 여기는 이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빵의 촉감이나 소리에 대한 지식이나 느낌은 자라면서 배워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다는 생각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경험 이전에 알게 된 것일까? 플라톤은 여기서 이 생각이 경험 이전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감각 경험을 태어나자마자 시작하지만, 같음이란 개념은 아무래도 감각경험을 하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으니까 영혼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플라톤이 '이데아'라 명명하는 이 개념은 수학적 진리나 특정한 도덕률 등 절대불변의 진리를 포함하는데, 플라톤은 본래 모든 영혼이 이데아를 가지고 있으나 환생하는 도중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전생의 기억과 함께 잊어버린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가진 어떤 지식들(이데아)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며 단지 우리가 떠올리지 못할 뿐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처럼 마음의 선천적인 면을 주장하면서 이데아를 비롯한 비물질적, 추상적인 존재를 주장한 플라톤의 주장은 이후 여러 지지를 받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자신이 애용하던 방법적 회의주의를 통해 인간의 정신(특히 이성)이 신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런 그에게 인간의 몸과 정신이 하나라는 현대 심리학자/심리철학자의 주장은 매우 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영원한 신의 영역에 속하는 정신(영혼)은 물질에 기반한 몸과는 서로 다른 존재라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했다. 심신 이원론의 문제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성질의 존재가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당시 막 발달하기 시작했던 해부학의 지식을 끌어와, 뇌 안의 작은 부위, 뇌 안에서 텅 비어 있어(뇌척수액을 빼면 비어보인다) 다른 존재가 들어오는게 가능한 송과선(pineal gland)이 영혼과 몸을 서로 이어준다고 주장했다.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유압을 통해 비행기를 조종하듯 영혼이 송과선을 흐르는 뇌척수액으로 유압을 일으켜 몸을 조종한다는 게 데카르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여러 반대에 직면했다. 사회계약설의 대부 토마스 홉스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반대하여 마음과 몸은 하나이고 마음은 뇌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이처럼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주장을 심신 일원론이라 한다) 당시 상업을 통해 발달하던 영국은 실질적, 실용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경험주의 학풍이 발달하고 있었고, 이 학풍이 정신적인, 추상적인 것을 중시하는 프랑스, 독일 등의 학풍과 충돌하여 심리철학 영역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의사 프란츠 조셉 갈은 홉스처럼 뇌와 마음은 하나이며 이는 뇌의 크기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뇌에서 범죄 담당부분이 크면 범죄자가 되고 지능 담당이 크면 지능이 좋다는 얘기다. 그는 동물이나 여러 방식으로 죽은 인간의 뇌를 관찰하여 뇌손상이 정신적인 능력을 떨어트린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비약하여 19세기 최대 유사과학중 하나인 골상학(phrenology)을 탄생시켰다. 갈은 두뇌에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결정하는 부분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고, 이 부위들의 크기나 형태에 따라 성격 및 행동 양식의 세부적인 형태가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두뇌 부위의 크기 및 형태는 두개골의 크기 및 형태를 결정하므로, 두개골을 관측하면 인간의 행동 양식 또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인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여 일찍이 과학계에서 방출되었다.[2]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단순한 사실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려드는 풍조와(혈액형 성격설이 대표적인 예), 때마침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여 어떻게든 외부의 야만인들을 깎아내리려고 했던 시대정신이 결합하여 골상학은 대중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각지의 사교클럽에서 사람들은 골상학을 주제로 떠들어댔고 그 유명한 <셜록 홈즈>에서도 골상학을 통해 상대의 심리를 추리하는 장면이 자주 묘사된다. 한편 이탈리아의 의사인 체자레 롬브로조는 골상학에 기반하여 범죄적 자질이 유전되며, 마찬가지로 머리 부위의 크기나 형태로 이를 알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사진 이마, 비정상적인 크기의 귀, 비대칭적인 얼굴, 앞으로 돌출된 턱, 평균 이상으로 긴 팔, 두개골의 비대칭 등 유색인종에게 두드러진 특성들을 포함한 몇가지 특성을 범죄적 자질로 해석했고, 이러한 인종차별적인 주장은 흑인, 동양인이 두개골이 작기 때문에 백인보다 멍청하다는 당대 지식인의 주장과 함께 별다른 과학적 증거없이 사회에 받아들여져 인종차별의 주된 논거가 되었다.


그러나 비과학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집단적 무지가 전유럽을 휩쓰는 가운데서도 몇몇 학자들은 과학적 정신을 유지해 나갔다. 당시 많은 해부학자들은 동믈의 특정 뇌부분을 손상시키면 해당 동물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점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점은 인간에게서도 관찰되었다. 프랑스의 외과의사 폴 브로카는 어느날 뇌의 왼쪽 일부분이 손상된 환자를 보게 되었는데, 이 환자는 다른 부분은 모두 멀쩡하였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오로지 tan이라는 음절만 낼 수 있었다. 환자를 관찰하던 브로카는 손상된 뇌 부분이 언어구사를 담당한다는 주장을 발표했고 이를 토대로 마음이 뇌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이 뇌영역은 오늘날 브로카 영역(Broca's area)으로 알려졌고, 브로카의 이 업적은 뇌과학의 시작이자 심리학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생리학자들도 인간심리에 접근하는 다른 문을 열고 있었다. 당시 측정기술의 발달로 생리학자들은 신경 충동의 속도와 같은 것들을 측정하는게 가능해졌다. 에너지물리학자이자 과학적 생물학을 주장했던 헤르만 헬름홀츠는 발전된 기술로 개구리 다리의 신경 충동 속도를 측정했고 후에 이를 인간 연구에 적용하였다. 헬름홀츠는 피험자의 다리의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었을때 피험자가 반응하도록 훈련시켰고, 각각 피험자들의 반응 시간을 기록하였다. 헬름홀츠는 허벅지보다 발가락을 자극할때 반응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 시간차로 신경충동이 뇌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해 냈다. 이 사실은 마음이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육체에 기반하여 움직인다는 주장을 다시한번 증명하고, 동시에 과학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연구하는게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당시 유럽을 여행하던 윌리엄 제임스는 1867년 베를린에서 이를 보았고, 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는 이미 거기에 매료되어 이를 이용한 심리연구에 빠져들었다.[3]


고전심리학[4]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1879년 12월 어느날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의 한 건물 3층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날 여기서 빌헬름 분트가 최초로 심리학 실험실의 문을 열였다. 사실 이전에도 분트는 인간심리에 대한 실험적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분트는 1867년 생리심리학에 대한 최초의 대학강좌를 열었고 이후 강의내용을 모아 1874년 <생리 심리학 원리(Principles of Physiological Psychology)>라는 책으로 출판한다. 이후 본격적인 심리학 연구를 위해 분트는 전적으로 심리학 연구만을 위해 설계된 실험실을 설립하였다. 이들이 여기 처음 설치한 기계는 공이 특정한 장치를 치는 시점과, 기계에 연결된 버튼을 누르는 시점간의 시간차를 측정하는 기계였다. 분트는 이 기계를 통해 단순한 자극과 반응처럼 가장 단순한 심적 과정을 측정하여 연구를 시작하고자 했고 이 작은 실험은 최초의 심리학 실험이 된다.


분트는 새로이 탄생한 과학적 심리학은 의식, 즉 세계와 마음에 대한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관적 경험은 깊은 생각에서 단순한 느낌까지 거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당시 화학자들은 화합물을 각 원소로 분해해서 화합물의 구조를 알고자 노력하였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분트도 마음의 기본요소를 분석하여 마음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구조주의(structuralism)라 하며 다른 고전심리학자 에드워드 티치너도 여기 가세한다. 한편 분트는 자신의 연구방법론으로 내성법(introspection)을 받아들였다. 내성법은 자기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자신이 직접 관찰하는 것으로 넓게 보면 자신의 심리상태를 관찰하며 독백하는 여타의 문학작품 속 주인공도 내성법을 행한다고 볼 수 있다. 분트는 주로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자극이 제시된 후 색의 밝기나 소리의 강도 등 그가 주관적으로 느낀 바를 얘기하게 하였고 이를 분석하여 주관적인 경험과 자극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은 내성법에서 도출된 결과가 다른 피험자에게선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결국 내성법은 심리학계에서 서서히 퇴출된다. 역시 고전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자신이 지은 고전 <심리학 원리>에서 내성법이 신뢰성이 약하지만 그래도 유용한 방법이라며 당대 젊은 학자들에게 반대하는 주장이 나온다. 마르크스에게는 마르크스만의 무언가가 있다며 끊임없이 노동가치설의 검증을 거부하는 노동사회학자들, 아직은 마음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중요하다며 심신이원론을 옹호하는 심리철학계의 몇몇 인지과학자들이 겹쳐보이는 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유럽에서 구조주의 심리학이 싹트는 동안 미국에서도 다른 기류의 심리학이 싹트고 있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분트의 심리학과, 특히 자연선택이론에 매료된 제임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대학에 심리학 강좌를 개설하고[5] 미국 고유의 심리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파는 기능주의(functionalism)라 불린다. 제임스는 냄새 맡기나 생각하기와 같은 능력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이 자연선택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생각하기와 냄새맡기가 수행하는 기능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제임스는 구조주의자도 관심을 가졌던 의식 역시 과거를 돌이켜보고, 현재에 적응하며, 미래를 계획하게 해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제임스는 비록 내성법과 즉각적인 경험에 대한 분트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6] 동시에 실험만으로는 의식연구에 한계가 있으며, 이렇게 실질적인 정서, 기억, 의지력, 습관 등의 생물학 기능과 진화론적 이점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제임스는 이러한 생각을 모아 출판업자 헨리 홀트오 함께 1890년 유명한 심리학 고전 <심리학의 원리>를 출판하는데, 집필에 2년정도 걸릴거라는 예상과 달리 12년을 소비한 끝에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이 나온 이후 분트는 그의 심리학이 문학일 뿐이라며 폄하했지만[8] 다른 이들은 거기 동의하지 않았고 기능주의는 북미 심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한편 분트가 심리학을 창시하기 전인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의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는 최면을 통해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보통 히스테리(histeria)라 불리는, 정서적으로 혼란스런 경험의 결과로 인지적 혹은 운동 기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는 증상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환자가 최면에 빠졌을때 증상이 완화되는 현상을 보고 최면에 흥미를 가졌다. 최면에 대한 관심은 분트에게는 비과학으로 치부되었지만[9] 윌리엄 제임스는 히스테리 현상에서 현대 뇌과학에서 중요하는 여러 개의 자아라는 개념을 이끌어냈고[10] 이런 연구가 마음의 작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름길이라 여겼다.[11] 제임스 이외에도 최면에 관심있는 학자는 꽤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젊은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Freud,1856-1939)도 그중 하나였다.


샤르코에게서 최면치료를 배운후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점차 샤르코와는 다른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가 보기에 히스테리의 원인은 고통스러운 아동기 경험으로 보였고 이 경험이 무의식을 통해 작동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무의식(unconscious)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무의식은 의식적 자각 밖에 있지만 의식적 사고, 감정, 행동에 영향을 주는 마음의 한 부분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걸 치료방법으로 삼았고, 이후 자신의 고유한 무의식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마음의 구조 이론과 치료기법을 발전시켜나갔다. 이들이 모여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 형성되었다.


20세기 초, 주류 심리학계는 프로이트의 과학적 방법론 결여를 들어 정신분석을 거부했다. 여기에는 성욕을 강조하고 성기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외설적인 설명도 한몫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수많은 추종자를 모았다. 이 중에 영향력있었던 제자로는 융과 아들러(1870-1937)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신분석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독자적인 흐름과 프로이트가 충돌하면서 결국 융과 아들러는 정신분석에서 떨어져나가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고,[12] 프로이트 사망 후 남은 제자들도 자아심리학파와 대상관계학파 나뉘어 서로 싸우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분파들은 임상심리학의 아버지들이었고 이들이 닦은 토대 위에서 후에 수많은 심리치료가 꽃피게 된다.


이렇게 19세기 말 다양한 심리학파가 심리학계를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다른 한편에서도 발달과학이 싹트고 있었다. 구조주의와 기능주의의 공존과 정신분석의 성장은 행동주의가 심리학의 주류로 부상하는 20세기 초까지 계속된다.


행동주의에서 인지혁명까지[13]

구조주의와 기능주의, 정신분석이 득세하던 심리학계는 20세기 초에 큰 전환점을 맞는다. 신예 심리학자였던 존 왓슨은 1930년, 당시 심리학의 방법론 중 하나였던 내성법을 비판하였다. 또한 동물의 의식적 경험처럼 정량적으로 연구할수 없는(정확히는 그렇다고 믿었던) 분야에 시간을 낭비하는 심리학계[14]에 진저리를 냈다. 대신 그는 쉽게 측정하고 계량할 수 있는 행동연구가 맘에 들었다. 내성법과 정신분석의 모호함이 만연하던 당대 심리학계에 도전한 그는 억압, 의식의 흐름, 무의식 등 당시 심리학이 관심을 가졌던 모호한 대상들이 아니라 단순 측정과 수량화가 가능한 행동주의가 심리학의 연구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에게 건강한 아기 12명과 그들을 키울 나만의 잘 만들어진 세계를 준다면, 그들 중에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서, 재능, 기호, 성향, 능력, 천직, 인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내가 선택한 전문직 중 하나로 성장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것이 의사든, 변호사든, 예술가든, 상인이든, 심지어는 거지나 도둑이든(Give me a dozen healthy infants, well-formed, and my own specified world to bring them up in and I will guarantee to take any one at random and train him to become any type of specialist I might select - doctor, lawyer, artist, merchant-chief, and, yes, even beggar-man and thief, regardless of his talents, penchants, tendencies, abilities, vocations, and race of his ancestors.)"


왓슨의 주장은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왓슨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당시에는 이미 유명한 파블로프의 연구가 학계에 발표되었다.[15] 또한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도 동물행동을 연구하여 도구적 조건형성 모델의 기반이 된 효과의 법칙을 정립하였다. 행동에 대한 연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갔고 특히 이들의 연구는 증명을 위해 침을 ml단위로 측정했던 파블로프처럼 과학적 엄밀성에 기초해 있었다. 왓슨을 비롯한 행동주의자들은 과학이 관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들어 심리학을 '관찰 가능한 행동의 과학'으로 재정의하였다. 이들은 심리학이 1)객관적인 과학이고, 2)모호한 심적 과정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복잡한 여러 요소들이 관련된 행동에서도 자극과 반응의 연합인 반사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행동은 환경 내의 자극에 대한 조건형성(conditioning)의 결과이고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후천적으로 형성된다. 감각은 자극에 대한 차별적인 반응으로 해석되었다.


초기 행동주의에서는 조건부여에 의해 조건자극이 무조건자극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건반응과 무조건반응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 후의 연구는 단순한 치환을 의문시하고, 조건반응을 무조건반응과 다른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클라크 L. 헐이나 버러스 F. 스키너등 신세대 행동주의자들은 자극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건형성되는 고전적 조건형성뿐만 아니라 자극을 판별하여 능동적으로 반응하도록 조건을 부여하는 도구적 조건형성의 절차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행동을 반사라고 하는 최소단위로 분석하여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전체(molar behavior)를 취급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헐은, 조건형성에는 유기체의 욕구감소(need reduction)이 필요하다 하고, 또한 조건자극에 대한 반응 경향은 그 밖에 흥분이나 금지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행동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자극(독립변수)과 반응(종속변수)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개변수(intervening variables, 헐은 이를 구성·요구·반응경향이라 불렀다)에 의해 연역적(演繹的)으로 설명된다고 하였다. 스키너는 그와 같은 구성은 장황하다 하여 자극과 반응의 상호관계에만 주목하는 기술적(記述的) 입장을 주장하였고 도구적 조건형성의 원리와 강화스케줄에 대한 기본 원리를 재정립하였다. 이들은 60년대까지 학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현재 심리학자들은 행동주의자들의 1)전제에는 동의하나 2)전제를 부인한다. 현대심리학자들은 심리연구에서 심적 과정은 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톨먼이 미로실험을 통해 자극-반응 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비연합학습을 발견한 후 많은 심리학자들은 마음이 정보를 기억하고 처리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를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 부른다. 동시에 심리학 외부에서도 지각, 사고, 기억, 언어 등 인간의 인지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심리학,철학,뇌과학,생물학이 뭉쳐 인지과학이 탄생했고 이는 인지과정을 다루는 인지심리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인지심리학자들은 행동주의자와 달리 심적 과정이 인간행동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전에 기능주의나 구조주의에서 그랬듯이, 그러나 고전심리학보다는 엄격한 방법론을 사용하여, 인간의 인지과정을 연구하였다. 이들의 업적은 신경과학, 인공지능에도 영향을 주었고, 임상심리학에서는 기존의 행동주의 치료와 융합하여 현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치료인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를 탄생시킨다.


인지행동치료가 임상심리학의 스타로 새롭게 떠오른 동안 또다른 기류가 심리치료계에서 싹텄다. 2차대전 이후 젊은 정신분석 치료자였던 칼 로저스는 비록 자신이 정신분석학파에 속해 있었지만 인간의 과거와 무의식, 욕망을 중시하는 정신분석학에 의문을 가졌다. 그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성취동기, 성장 잠재력과 같은 긍정적인 특성도 중요했다. 이후 칼 로저스는 정신분석학에서 독립하여 인간의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특성에 초점을 둔 인간중심치료를 창안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심리학계에서도 에이브러햄 매슬로우(1908~1970)와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가 등장하여 심리학계의 행동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긍정적이고 밝은 특성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긍정적 잠재력을 강조하는 사조를 인본주의 심리학(humaistic psychology)이라 부른다. 이들은 처음으로 "환자"라는 용어를 "내담자"로 대체하였고 인간의 잠재력에 높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현재 긍정심리학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1. 이상 Schactor 외 2명,'심리학 입문(2판)',민경환 외 8명 역,시그마프레스,2015,pp4-5
  2. Fancher, R. E. (1996). Pioneers of psychology. WW Norton & Co.
  3. 이상 Schactor 외 2명,'심리학 입문(2판)',민경환 외 8명 역,시그마프레스,2015,p6
  4. Mers & Dewall,'마이어스의 심리학개론 11',신현정 & 김비아 역,시그마프레스,pp2-4;Schactor 외 2명,'심리학 입문(2판)',민경환 외 8명 역,시그마프레스,2015,pp7-11
  5. Schultz, D. P., & Schultz, S. E. (2015). A history of modern psychology. Cengage Learning.
  6. Bjork, D. W. (1983). The Compromised Scientist.
  7. James, W., Burkhardt, F., Bowers, F., & Skrupskelis, I. K. (1890).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 1, No. 2). London: Macmillan.
  8. Bjork, D. W. (1983). The Compromised Scientist.p12
  9. Bjork, D. W. (1983). The Compromised Scientist.
  10. James, W., Burkhardt, F., Bowers, F., & Skrupskelis, I. K. (1890).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 1, No. 2). London: Macmillan.p400
  11. Taylor, E. (2011). William James on consciousness beyond the margi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2. Sulloway, F. J. (1992). Freud, biologist of the mind: Beyond the psychoanalytic legend. Harvard University Press.
  13. Mers & Dewall,'마이어스의 심리학개론 11',신현정 & 김비아 역,시그마프레스,p4;Schactor 외 2명,'심리학 입문(2판)',민경환 외 8명 역,시그마프레스,2015,p12
  14. Furumoto, L., & Scarborough, E. (1987). Placing women in the history of comparative psychology: Margaret Floy Washburn and Margaret Morse Nice. Historical perspectives and the international status of comparative psychology, 103-117.
  15. Fancher, R. E. (1996). Pioneers of psychology. WW Norton & 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