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사관
이 책은 조선왕조의 사관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다.
정의
+/-한국의 근세 시대인 조선 제국(朝鮮 帝國) 시대의 왕실 역사의 사관에 대한 내용이다.
관제의 추이
+/-한국에서는 삼국의 국사편찬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삼국 시대부터 사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구체적인 직제나 관명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사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사』 권76 백관지 춘추관조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는 국초에 국사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사관을 설치하고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직관 등의 사관을 두었다. 고려 말기에는 충렬왕 34년에 충선왕이 사관을 문한서와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 하였고, 충숙왕 12년에 이를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였다. 이 때 춘추관에는 영관사, 감관사, 지관사, 동지관사, 충수찬관, 충편수관, 겸편수관, 공봉, 수찬, 검열을 두었는데, 공봉 이하가 춘추관의 실무를 담당한 전임 사관으로 정원은 공봉, 수찬 각 1명, 검열 2명이었다. 이후 공민왕 5년에 반원운동을 일으킬 때 춘추관을 초기의 사관으로 환원하였다가 동왕 11년에 다시 춘추관으로 고치고 공양왕 원년에 예문관과 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1]
이러한 직제는 조선 건국 직후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즉 태조 원년 7월 건국 직후에 직제를 반포한 교서에서 ‘교명과 국사를 논의하는 일을 맡은 관서’로 예문춘추관제가 발표되었다. 예문춘추관은 임금의 명령을 짓는 일과 국사를 논의하는 두 가지 다른 기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직제도 예문관과 춘추관이 혼성된 것이었다.[2] 태종 원년 관제개혁 때는 이를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시켜 예문관 직원은 녹관으로 하고 춘추관 직원은 겸관으로 하였다. 이 때 춘추관의 조직은 영관사, 감관사, 지관사, 동지관사, 충수찬관, 편수관, 기주관, 기사관으로 구성하였다가, 세조 12년 관제를 정할 때 영관사를 영사, 감관사를 감사, 지관사를 지사, 동지관사를 동지사, 충수찬관을 수찬관으로 그 명칭만을 바꾸었다.[3]
춘추관의 겸관제는 『경국대전』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춘추관은 시정의 기록을 맡으며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되 다른 관사의 관원으로 겸임케 하였다. 수찬관 이하는 승정원 ․ 홍문관 부제학 이하, 의정부 사인 ․ 검상 ․ 예문관 봉교 이하 및 시강원 당하관 2원 ․ 사헌부 집의 이하, 사간원 ․ 승문원 ․ 종부시 ․ 육조 당하관 각 1원이 겸한다고 규정하였다.[4]
사관의 직무
+/-사관의 법제적인 직무는 『경국대전』에 “시정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사관은 사초나 시정기의 작성 이외에도 춘추관의 거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점차 그 비중이 확대되면서 왕명을 받아 다른 관서에 분견되어 그곳 사정을 조사하여 보고하는 일까지 담당하게 되었다.[5]
사초의 작성
+/-사관의 가장 큰 직무는 사초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사초는 봉교 이하 대교 ․ 검열 등 8명의 사관이 번을 나누어 궁중에 숙직하면서 조계, 경연, 윤대, 정청 등의 항례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백관회의와 기타 여하한 중대회의에도 모두 참석하여 시정의 득실과 임금의 언동, 인물의 선악 등을 기록한 것으로 실록편찬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태조 원년 9월에 사초작성에 관한 법식을 마련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정전에서 만기를 재결하고 신료들을 접견할 때 사관으로 하여금 좌우에 입시하게 하고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듣고 기록하게 할 것. 2. 겸관으로 수찬이하의 관직에 충당된 사람은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사초를 작성, 춘추관에 보낼 것.
이같은 기본적인 법식을 바탕으로 세종 31년에는 기재태도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1. 사관이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을 싫어 하거나, 혹 친척과 친구의 청을 들어서 그 사적을 없애고자 하여 권종을 완전히 훔치는 자는 제서를 도둑질한 율로써 논죄하여 참할 것. 2.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는 제서를 찢어버린 율로써 논죄하여 참할 것. 3. 동료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한 자는 율에 의해서 1등을 감할 것. 4.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한 자는 근시관이 기밀의 중한 일을 남에게 누설한 율로써 논죄하여 참할 것. 5. 위 사건으로 인한 죄를 용서 받았다 하더라도 정범인은 고신을 빼앗고 영영 서용하지 말 것. 6. 범인이 물고되었어도 역시 견탈을 행하고,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한 자와 누설한 자는 직첩만 거두게 할 것.
사관은 사초를 二本 작성하여 한 부는 임금이 승하하면 춘추관에 납부하였고, 나머지 한 부는 집에서 보관하도록 하였다. 기한을 정하고 납입하게 하였는데, 기간을 어기면 자손은 금고에 처하고 백은 20냥쫑을 징수하였다.
시정기의 작성
+/-실록편찬에 있어서 기본 자료는 사초와 시정기이다. 시정기는 『승정원일기』 및 각 관청의 긴관문서(緊關文書)를 연 ․ 월 ․ 일 순으로 찬집한 것으로 당나라 무후 때로부터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의 역대목록이라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에서는 태조 건국 이후 곧 역사편찬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 사관의 사초 이외에 각 관청에서 시행한 일 가운데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일을 기록하여 춘추관에게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시정기의 시작으로 보인다. 세종 16년에는 춘추관으로 보낸 각 관청의 안건을 사관으로 하여금 미리 연 ․ 월 ․ 일 순으로 종합 정리하게 하여 시정기라 이름하고 이에 대한 제(諸) 원칙을 정함으로써 시정기 작성은 본격화되었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예문직제학과 직관으로 하여금 사관을 겸임하게 하여 춘추관에 앉아 모든 대소아문에서 보고하는 문서를 점검하여 연․ 월․ 일 순으로 편찬하여 찬록케 하고, 이것을 송나라 조정의 고사에 따라 시정기라 이름할 것. 2. 당상관 한 사람이 매월 한 차례씩 춘추관에 앉아서 시정기 수찬의 근만(勤慢)을 엄하게 검찰할 것. 3. 시정기 한 벌을 3년에 한번씩 포쇄하는 해에 법식에 의하여 충주사고에 보관할 것. 4. 대간의 상소와 신하들이 상서하여 일을 아뢴 것을 기사관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바치게 할 것. 5.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은 국가와 군민의 사체에 관계되는 것을, 서장관이 보고 듣는 것을 기록하는 예에 의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써서 춘추관에 바치게 할 것.
시정기의 체제는 『대전조례』 춘추관조에 잘 나타나 있다. 제 1행에는 연월일의 간지와 날씨를 쓰고 그 밑에 쌍서(雙書)로 지방의 재변을 기록하였다. 제 2행에는 왕의 소재와 상참, 경연의 정지 여부를 쓰고 그 밑에 이어서 차례대로 사실을 기록하는데, 입시하여 설명한 내용은 그 요점만을 따로 기록하였다. 연혁, 시비 같은 것은 비록 주사인(奏事人)이 아뢰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 본말을 상세히 기록하고 포폄의 자료가 될만한 것은 별도로 강목을 정하여 하단에 기록하였다. 대간의 계사(啓辭)는 가장 형식적인 것 외에는 모두 기록하고 한 가지 일을 누차 상주하면 날마다 연계로써 기록하되 만약 첨가한 말이 있으면 또한 초록하여 기록하고, 다만 사헌부, 사간원이라고만 쓰고 래계하는 사람의 성명은 쓰지 아니하며 논하는 바가 중대사일 경우에만 발론한 사람과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함께 기록하였다. 소장(疏章)은 긴요한 것만 재록하였으며, 길흉사에 대한 예외로서 후고할 것이 있으면 비록 번잡하다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리고 각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몇 등에 몇 사람이라는 것만을 기록하고 인사임명은 다만 고관과 원직 및 긴중한 지방관직만 기록했으나, 특명으로 임용한 자와 논란이 있는 관원은 비록 미관이라 할지라도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을 마치면 더욱 신중을 기하여 반드시 공의를 참조하여 자기의 주관에 따라 포폄을 정하였다. 또한 각 관사의 계하(啓下)문서는 그 월말의 성책(成冊)을 고찰하여 기록할 만한 것을 골라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형식에 의해 작성된 시정기는 정본 이외에 또 다른 부본을 초서하여 두고 이를 비초라 하여 춘추관의 포폄 때에 당상관이 이를 참고하여 그 근만을 평가하였다.
실록의 포쇄와 분견
+/-사관은 사초와 시정기의 작성 이외에 실록에 관한 거의 모든 일을 담당하였다. 완성된 실록을 춘추관에서 각각 4부씩 만들어 1본은 춘추관에 3본은 충주와 전주, 성주사고에 각각 분장하였다. 이렇게 간직된 실록이 장마 등으로 인하여 젖거나 습기가 차서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람을 쏘이고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하였다. 이밖에도 사관은 당시에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였고 또한 직무상 언제나 국왕의 측근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왕의 명을 받아 다른 관서에 분견되어 그곳 사정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