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영어명: Thomas More) 는 영국의 한 사상가이다.

출생과 십대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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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는 1478년 2월 7일에 영국 런던에서 법관 존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2살이 되었을때, 당시 캔터메리 대주교이자 종교계의 큰 지도자였는 존 모턴의 시중드는 아이로 들어갔다. 그의 추천으로 인해 모어는 14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하고 뉴인 법학원에 들어갔다.

헨리7세와의 정치기간과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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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인 법학원에 들아간후, 1500년 에 23세의 나이로 변호사가 되었다. 4년후인 1504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수입을 늘리려는 헨리7세의 세금정책에 반대하다가 의원직을 잃었다. 그 후로는 역사와 철학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많은 저술을 탄생시켰다. 특히 1518년에 낸 <리처드 3세>라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의 원본이 되었다. 1505년에는 제인 콜트라는 자신보다 10살 어린 여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지주의 딸이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모어는 그녀에게 라틴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새벽2시에 일어나 7시까지 공부하고 매일아침 미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이를 돕고 양로원을 세우고 전속법률가가 되어 가는한 시민을 위해 변호 활동을 하여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1515년, 그의 아내인 제인 콜트가 죽자, 바로 엘리스 미들턴이라는 여성과 재혼하였다.

헨리8세와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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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헨리7세를 이어 헨리8세가 국왕으로 즉위한후, 그는 1510년에 런던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1515년엔 플랑드르로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약 7개월동안 머물렀는데, 통상조약을 잘 체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유토피아>의 2권을 쓰기 시작하고, 귀국을 하여 1권을 쓴뒤 1516년에 그 책을 완성하였다. 헨리 8세는 그의 업무처리 능력을 잘 평가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유능하고 공정한 공무원으로 불렀다. 1529년에는 헨리8세는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였다.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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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법관 자리는 그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그 이유는 1532년 5월 15일,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영국 가톨릭 교회를 끊게 하고 자신을 영국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로 선언하게 만들었다. 토머스 모어는 로마 가톨릭 지지자였는데, 헨리 8세는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설득하였으나, 모어는 뜻을 받들이지않았다. 1533년 앤 왕비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1534년 의회에서 통과된 왕위계승법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법은 캐서린과 헨리8세사이에서 태어난 메리공주의 왕위계승을 금지하고 앤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모어는 1534년 4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는 15개월 동안 런던탑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평소에 자신이 하던 저술활동을 계속하였지만 펜을 빼았기고 책도 들여오지 못하게 되어서 저술활동도 계속할수 없었다. 심문은 반복되었고 식사량은 줄었으며 관절염에 걸리는 등 몸 상태가 나빠졌지만 그는 타협하지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1535년 7월 1일엔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5일 후, 그는 단두대로 향했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심지어 형리들에게 농담까지 하였다. 그는 그들을 일일이 포홍한 다음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네덜란드의 한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는 '토마스모어, 영국의 수상, 그는 눈보다 희고 순결한 영혼을 가졌다. 영국에서는 그의 천재성은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다시 찾을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페인의 찰스5세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모어는 1935년 5월 20일 교황 비오 9세에게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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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머스 모어(위키백과 문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