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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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다음은 중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중국은 옛날부터 역사가 많기로 유명한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중국은 유구한 문화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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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논쟁 ===
 
* 서방전래설 = 안델슨, 채도서방전래설채도의 주장. 중국 민족과 문명의 서방기원설이 한때 유행했다.
* 중국자생설 = 1949년 이래 20세기 후반기는 중국 고고학의 황금 시대인 것을 감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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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느 정도는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어서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 시기는 허구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 구석기 = 유명한 유적지로는 170만년 전 윈난 성 원모인이 발견됨. 또 50만년 전에 베이징 특별시 부근의 주구점에서 베이징인 발견, 서방과는서양인과는 다른 골격 구조에 몽고몽골 계통의 골격 구조. 중국의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음을 의미하며, 서방전래설 부정 근거이다.
* 신석기 = 유명한 유적지로는 기원전 7000년 경에 마제석기, 토기, 농경생활, 목축 등을 시행했던 것으로 씨족 공동체 사회를 이뤘다는 증거다. 허난 성 안양 시 부근의 상대 유적지에서 대상 제국 문화, 용산 문화, 앙소 문화가 상중하의 문화층을 이루고 있는 형태로 발견되어 각 문화의 관계와 시대적 선후를 입증함. 신석기인이 현대 중국인의 확실한 조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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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 제국 ===
 
드디어 중국에서 첫 번째로 대제국을 세워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영정은 춘추 전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대국왕보다 더 높은 존재인 세계에서 가장 직위가 높은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우선 영정은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종전에 시행했던 봉건 제도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군현 제도를 채택한다. 군현 제도는 황권 강화에 큰 몫을 하였고, 덕분에 지방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정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 부병제를 직접 채택했고, 대천황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고자 아방궁 등의 화려한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만리장성은 대진 제국 때 지어지기 시작했다.(물론 만리장성은 대진 제국 이전 시기에도 지어져 있었다. 다만 영정은 따로따로 흩어진 만리장성들을 거대한 장성으로 만들고자 보수 및 확장공사를 감행했을 뿐이다.)
 
그러는 한편 영정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높여갔고, 경제적으로 대진 제국을 발전시키고자 지방과 지방 간의 무역을 끊임없이 시행해 나갔다. 황허 강에서부터 창 강까지의 사이에 있는 곳을 전부 대운하를 만들어 지역 교류를 원활하게 했고, 그 결과 황허 강 북부와 창 강 남부의 특산물들이 서로 교환되어가면서 중국의 문물들이 다양하게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정은 분서갱유(서적들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땅 속에 묻어버리는 행위.)라는 악행을 저질렀고, 영정의 철권 통치로 인해서 급기야는 백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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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시대 ===
 
대한 제국이 거의 망해갈 무렵에, 황궁은 대천황을 보좌하는 열 명의 내시들이 제국을 말아먹고 있었다. 이들은 십상시로 불리었고 그 당시 대천황인 유굉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이 권력을 멋대로 행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십상시에 대항해서 노란 두건을 쓴 도적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우는 반란이다. 황건적의 대장인 장각은 아우인 장보와 장량과 힘을 합쳐 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만의 황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백성들은 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건적이 황국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황건적은 대한 제국을 보호하려는 군벌들에 의해서 결국 무장 진압되고 말았고 장각과 장보와 장량도 전사하고 말자, 황건적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만다.
 
==== 대위 제국 ====
 
조비가 대천황이 되었다.
 
==== 대오 제국 ====
 
손권이 대천황이 되었다.
 
==== 대촉 제국 ====
 
유비가 대천황이 되었다.
 
=== 대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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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 제국의 대천황인 이연은 원래 대수 제국의 지방 절도사를 겸임하고 있었으나, 대수 제국이 자주 고구려를 포함한 이민족 국가들을 침범함으로써 국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대수 제국은 이연에 의해서 망해버렸고 이연은 새로이 대당 제국을 수립한다. 대당 제국은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번창했고 강대했던 제국이기도 하다. 정관지치와 개원지치를 이루어 백성들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던 제국이다.
 
=== 대송 제국 ===
==== 전기(북송 시대) ====
 
대송 제국의 대천황인 조광윤은 5호 16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조광윤은 비록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문치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광윤은 칼에 의한 정치보다는 붓에 의한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선포한 대천황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대송 제국의 군대는 대부분 해체되었으며, 무관들은 문관들보다도 대접을 좋게 받지 못했다. 그리고 종전의 부병제보다는 모병제를 직접 채택함으로써 국방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칭송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부담감 없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실제로 대송 제국은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찬란한 문화가 발달했던 시기이다. 중국의 귀중한 유산들이 거의 대송 제국 때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치주의는 결국 국력의 급격한 쇠퇴를 낳기 시작했다.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자 주변의 이민족들은 대송 제국을 얕잡아보면서 끊임없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특히 거란 족과 여진 족과 몽골 족들의 침입이 극성했다.
 
==== 후기(남송 시대) ====
 
결국 대송 제국이 대금 제국에 의해서 망해버리자, 대송 제국의 황족들은 카이펑에서 항저우로 피난하였고 항저우에 다시 대송 제국을 세웠다.
 
== 근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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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 제국 ===
 
여진 족이었던 누르하치는 이자성을 이용하여 몰래 자신들만의 황국인 대청 제국을 설립하고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베이징을 점령한 여진 족들은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반역자 이자성을 끝까지 추적하여 이자성을 붙잡아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대청 제국 역시 대원 제국 때처럼 이민족 황국이었으나, 여진 족은 몽골 족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여진 족은 중국의 전통 민족인 한민 족들을 회유하는 정책들을 많이 이용했다.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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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인민공화국 ===
 
국민당이 한창 중국에서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고 있을 무렵, 느닷없이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켜 베이징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린다.
 
 
== 신화적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