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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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영국은 옛날부터 역사가 많기로 유명한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영국은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문화들이 남아있으며, 첫 번째로 의회대의회 민주주의를 시행한 나라인 입헌 황국이기도 하다. 아울러 외국인들도 서양 역사에서 첫 번째는 영국 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영국은 역사가 깊다.
 
== 고고학적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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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영국 제국 : 대제국의 위기와 대의회의 등장 ===
 
이런 대 영국 제국에도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절대 군주제가 점점 쇠퇴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603년 대 영국 제국의 새로운 대천황인 제임스 1세가 황좌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귀족들과 평민들과 노예들의 불만이 엄청 많았는데, 바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제국의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제국에서 제임스 6세로 불리우며 스코틀랜드 제국의 대국왕으로 있었다가 대 영국 제국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는 과거 스코틀랜드 제국의 대국왕 시절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는 과거 엘리자베스 1세 대천후의 절대 황권 시절에도 꾸준히 그 실력을 키워 왔던 중산층들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의회의 대신들은 이제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이들은 재산과 지위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 스스로 노력을 하여 부를 쌓은 사람들인 청교도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은 새로운 대천황이 부임할 때부터 은근히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중산층과 그들의 대표자인 대의회의 대신들의 불만을 전혀 몰랐던 제임스 1세는 여전히 절대적인 황권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끝내 이것이 대천황과 대의회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원인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큰 장애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대 영국 제국의 재산이 모자랐다는 점이었고, 끝내 제임스 1세는 대신들과 협약을 하여 대의회를 열었다.(대 영국 제국은 1215년 존 대천황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함으로써,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대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대 영국 제국에서 첫 번째로 대의회가 열렸던 것이며, 대신들은 대천황에게 세금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 대신 대 영국 제국의 성직자들의 태도는 매우 불량했고 재산을 모으기에 정신이 팔려 교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말했다. 따라서 대신들은 대천황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부패한 성직자들을 감독하고 감시할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제임스 1세는 사실 절대 황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대천황과 대의회의 화합은 처음부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1605년 가톨릭 교도들이 황궁 안의 상원 대의회 지하실에 대천황과 성공회 중심인 대의원들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다행히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 제임스 1세는 또다시 두 번째 의회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공동의 적인 가톨릭 교도의 탄압을 위해서 대천황과 대의회는 서로 가까워지는 듯 했다. 그러나 대천황과 대의회의 새로운 충돌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말았는데.
 
=== 대 영국 제국 : 권리 청원 및 청도교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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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629년 다시 찰스 1세에 의해서 대의회가 열렸는데, 비록 찰스 1세가 독실한 성공회 교도였지만, 찰스 1세가 앙리에트 대천후와 결혼할 때 약속한 대로 가톨릭을 금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의회는 심한 반대를 하면서 대천황과 정부를 비난하였고, 그 중 가장 심하게 항의한 자는 처음으로 대의회 의원에 당선된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자였다. 대천황이 참석한 대의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찰스 1세는 이 사태를 종결하기 위해서 강제로 대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비난이 더욱 거세졌고, 대신들은 대국민들을 대표하여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꾸는 사람들과 가톨릭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대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올리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그 세금을 바친 자들을 모두 대 영국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기로 나섰다! 결국 찰스 1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대 영국 제국에 대의회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대의회를 폐지시켰다.
 
그로부터 11년 동안 찰스 1세는 대의회 없이 외롭고 괴롭게 대 영국 제국을 통치해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1640년 다시 의회를대의회를 소집할 수 밖에 없었다. 찰스 1세는 대신들과의 단합을 통해서 잠시나마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스코틀랜드의 군대를 무찌를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끝내 대천황의 호소를 거부했고, 대천황은 3주 만에 또 대의회를 해산시켜버렸는데 이를 '단기 대의회'라고 말한다. 그 동안 스코틀랜드의 군대는 승승장구하게 계속 대 영국 제국의 영토를 침략해왔고, 결국 또다시 찰스 1세는 1640년에 다시 대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대의회는 1653년까지 계속되어 '장기 대의회'라고 불린다. 대의회는 열리자마자 대신들의 과격한 행동부터 시작하여 대천황과 그와 가까운 대신들을 잡아 가두거나 사형에 처했다. 급기야는 대천황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고등 법원과 성실청을 없애버렸다. 특히 청교도인 존 핌을 지도자로 하는 대의회는 찰스 1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들고 나서기까지 하는데.
 
존 핌은 이제 더 이상 대천황이 대제국의 일을 맡길 수 없다는 형편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고, 대의회는 대천황에게 대의회로 하여금 국정을 살필 수 있게 하여 제국의 살림을 속속들이 감시 및 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대천황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을 주기로 한 번은 대의회가 열릴 수 있게 해야 하며, 대천황은 대의회의 승인 없이 대의회를 해산시키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대의회에 직접 출격했다! 찰스 1세는 지금 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데 그 따위 요구나 하고 있는 대신들을 강하게 욕했다. 대신들이야말로 비겁한 반역자이며 적에게 제국을 팔아 넘기려는 자들이니, 조국과 황관의 이름을 체포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대의회의 권력도 막강했는데, 바로 대천황의 권한으로는 절대 대국민들의 대표를 체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정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대천황이야말로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명했다. 아울러 대천황이 무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요구를 이행시키려고 한다면, 자신들도 무력으로 이에 맞설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황당파(皇黨派)와 의회파(議會派) 사이에서 8년이나 되는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의회파의 중심 세력이 산업 자본가들과 혁명적인 지주들로 이루어진 청교도였으므로 이것을 청도교 혁명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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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영국 제국 : 공화정 시대와 황정 복고 ===
 
1649년에 대의회는 황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렇지만 정권을 쥔 대의회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정치 싸움이 계속되어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혼란을 바로잡은 사람은 크롬웰로 1653년에 대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결국 1640년 이래 계속된 장기 대의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크롬웰은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서 철저한 청교도적인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그 증거로 극장은 모두 문을 닫고 음악과 미술과 문학 등의 예술은 종교적인 것만이 허용되었으며 가톨릭 교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그러는 한편 크롬웰은 자신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부하들을 시켜 대국민들을 몰래 감시하고 엄한 처벌을 강행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세금은 몇 배나 무거워졌으며, 대제국의 재산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대국민들의 불평도 그만큼 높아져 갔다. 게다가 크롬웰은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선거에 나서는 자격마저 엄격히 정해버렸기 때문에, 대국민들이 정치에 참가할 기회는 더욱 적어져버렸다적어져 버렸다.
 
비록 이것이 신앙심과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크롬웰의 독재 정치는 대국민들의 마음을 멀어지게 했다. 마침내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할 때 이미 모든 대국민들은 그의 적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크롬웰도 대 영국 제국을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 증거로 크롬웰은 청교도였기 때문에 상업과 공업의 발전에 엄청난 노력을 하여 대 영국 제국의 국력을 크게 키우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1651년에 크롬웰은 항해 조례를 발표함으로써 네덜란드 제국과 충돌했다. 결국 네덜란드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는데 대 영국 제국이 네덜란드 제국을 무찌름으로써 대 영국 제국이 바다를 제패하여 세계의 상권을 장악하고 최대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어쨌거나 크롬웰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을 호국경으로 정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대국민들의 거센 반발로 결국 6개월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결국 대 영국 제국은 다시 황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