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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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뒤숭숭한 영국은 한 때 앵글로색슨 족의 침공을 받아서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한 때 영국의 상황은 나빴으며 결국 6세기 경에 영국은 7개 대황국 시대가 찾아오면서 대제국이 분열되고 말았다. 하지만 829년 통일 대황국을 이루고 다시 영국은 제국의 구실을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해럴드 2세 대천황은 무능력자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원성을 많이 받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노르망디 공국의 대국왕인 윌리엄이 침공하기 시작하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본래 윌리엄은 서 프랑크 대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신하였다. 그러나 정복 욕심이 상당히 강했고, 다른 영토를 점령해서 자신이 대천황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서 프랑크 대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상태라 감히 서부 프랑크 황국을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윌리엄은 시선을 바다 밖인 영국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1066년에 윌리엄은 해럴드 2세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올라 윌리엄 1세 칭호를 받고 백성들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노르만 황조의 치세가 시작된다. 윌리엄 1세는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둠스데이 북이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 제도는 바로 영토 조사였다. 즉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어가서 대황국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을 대 영국 제국의 봉건 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겠다. 속칭 봉건 제국인 노르만 황조 시대라고 일컫는 시기이다.
 
그런데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황국을 다스리게 되자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 황국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언어조차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영국어는 상스럽다고 해서 금지되었고, 황궁과 관청 등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국의 주인은 서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분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정복지인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이 되었으므로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은 곧 서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의 신하라는 묘한 관계가 성립되고 말았다. 그런 잉글랜드 황국의 대천황은 실제로 세력이 서부 프랑크 황국보다도 강대했기 때문에, 비록 신하의 처지라고 해도 자신보다 세력이 약한 서부 프랑크 황국의 대천황에 대한 불만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것이 끝내는 백년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시대가 시작되는 원인으로 자리잡았다.
 
=== 마그나 카르타의 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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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1년 동안 찰스 1세는 대의회 없이 외롭고 괴롭게 대 영국 제국을 통치해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1640년 다시 대의회를 소집할 수 밖에 없었다. 찰스 1세는 대신들과의 단합을 통해서 잠시나마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스코틀랜드의 군대를 무찌를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끝내 대천황의 호소를 거부했고, 대천황은 3주 만에 또 대의회를 해산시켜버렸는데 이를 '단기 대의회'라고 말한다. 그 동안 스코틀랜드의 군대는 승승장구하게 계속 대 영국 제국의 영토를 침략해왔고, 결국 또다시 찰스 1세는 1640년에 다시 대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대의회는 1653년까지 계속되어 '장기 대의회'라고 불린다. 대의회는 열리자마자 대신들의 과격한 행동부터 시작하여 대천황과 그와 가까운 대신들을 잡아 가두거나 사형에 처했다. 급기야는 대천황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고등 법원과 성실청을 없애버렸다. 특히 청교도인 존 핌을 지도자로 하는 대의회는 찰스 1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들고 나서기까지 하는데.
 
존 핌은 이제 더 이상 대천황이 대제국의 일을 맡길 수 없다는 형편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고, 대의회는 대천황에게 대의회로 하여금 국정을 살필 수 있게 하여 제국의 살림을 속속들이 감시 및 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대천황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을 주기로 한 번은 대의회가 열릴 수 있게 해야 하며, 대천황은 대의회의 승인 없이 대의회를 해산시키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대의회에 직접 출격했다! 찰스 1세는 지금 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데 그 따위 요구나 하고 있는 대신들을 강하게 욕했다. 대신들이야말로 비겁한 반역자이며 적에게 제국을 팔아 넘기려는 자들이니, 조국과 황관의 이름을이름으로 대신들을 체포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대의회의 권력도 막강했는데, 바로 대천황의 권한으로는 절대 대국민들의 대표를 체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정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대천황이야말로대천황이 오히려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명했다. 아울러 대천황이 무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요구를 이행시키려고 한다면, 자신들도 무력으로 이에 맞설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황당파(皇黨派)와 의회파(議會派) 사이에서 8년이나 되는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의회파의 중심 세력이 산업 자본가들과 혁명적인 지주들로 이루어진 청교도였으므로 이것을 청도교 혁명이라고 불린다.
 
1642년에 시작된 황당파와 의회파의 전쟁은 처음에는 황당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크롬웰이 지휘하는 철기군의 대활약에 의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는데, 크롬웰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대천황의 군대를 무찔러 대세를 크게 바꾸었다. 이 전쟁은 결국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를 거머쥐었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가 결국 붙잡혀 포로가 되어 의회파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다. 1649년 135명의 황궁의 재판정에서 심판관이 모인 자리에서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관들은 대천황 찰스 1세를 반란죄로 고발했고, 대의회와 대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찰스 1세를 폭군이자 반역자며 살인자며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이 재판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아직도 합법적이며 당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대의회 의원들이라도 틀림없는 대 영국 제국의 대신들이거늘, 대신들이 대천황을 상대로 전쟁하며 재판을 하는 것이 반란이라고까지 말했다. 어쨌거나 1주일 뒤에 찰스 1세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형 판결에 서명한 사람들은 크롬웰을 비롯한 59명 뿐이었지만, 사형 선고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신들이 대천황에 대한 불만이 컸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