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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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정밀37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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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핌은 이제 더 이상 대천황이 대제국의 일을 맡길 수 없다는 형편에 이르렀다고 주장했고, 대의회는 대천황에게 대의회로 하여금 국정을 살필 수 있게 하여 제국의 살림을 속속들이 감시 및 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대천황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을 주기로 한 번은 대의회가 열릴 수 있게 해야 하며, 대천황은 대의회의 승인 없이 대의회를 해산시키거나 정지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대의회에 직접 출격했다! 찰스 1세는 지금 제국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데 그 따위 요구나 하고 있는 대신들을 강하게 욕했다. 대신들이야말로 비겁한 반역자이며 적에게 제국을 팔아 넘기려는 자들이니, 조국과 황관의 이름으로 대신들을 체포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대의회의 권력도 막강했는데, 바로 대천황의 권한으로는 절대 대국민들의 대표를 체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정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의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대천황이 오히려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명했다. 아울러 대천황이 무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요구를 이행시키려고 한다면, 자신들도 무력으로 이에 맞설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황당파(皇黨派)와 의회파(議會派) 사이에서 8년이나 되는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의회파의 중심 세력이 산업 자본가들과 혁명적인 지주들로 이루어진 청교도였으므로 이것을 청도교 혁명이라고 불린다.
 
1642년에 시작된 황당파와 의회파의 전쟁은 처음에는 황당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크롬웰이 지휘하는 철기군의 대활약에 의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는데, 크롬웰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대천황의 군대를 무찔러 대세를 크게 바꾸었다. 이 전쟁은 결국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를 거머쥐었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스코틀랜드 제국으로 도망쳤다가 결국 붙잡혀 포로가 되어 의회파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다. 1649년 135명의 대신들이 황궁의 재판정에서재판정으로 모여 심판관이 모인있는 자리에서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관들은 대천황 찰스 1세를 반란죄로 고발했고, 대의회와 대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찰스 1세를 폭군이자 반역자며 살인자며 대 영국 제국의 적이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이 재판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아직도 합법적이며 당당한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대의회 의원들이라도 틀림없는 대 영국 제국의 대신들이거늘, 대신들이 대천황을 상대로 전쟁하며 재판을 하는 것이 반란이라고까지 말했다. 어쨌거나 1주일 뒤에 찰스 1세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형 판결에 서명한 사람들은 크롬웰을 비롯한 59명 뿐이었지만, 사형 선고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신들이 대천황에 대한 불만이 컸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마침내 1649년 찰스 1세가 사형장에 올랐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천황이 대국민들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죽기 직전에 찰스 1세는 자신은 오로지 대제국과 대국민들을 위해서 그 긴 세월을 오랫동안 싸워 왔다고 주장했고, 앞으로의 후손들이 대천황 찰스 1세는 정당했었고 지금의 대 영국 제국은 역사에서 가장 큰 오류를 범했노라고 합리화했다. 그리고 찰스 1세가 단두대의 칼날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가는 순간, 런던 특별시에서는 끔찍한 천둥 번개가 하루 종일 쳤다고 기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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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찰스 1세의 첫 번째 황태자인 찰스 2세가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은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매우 싫어했고, 대국민들이 전통적으로 섬기던 대천황을 원했다. 크롬웰을 피해서 외국으로 망명했던 찰스 2세는 대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다시 런던 특별시로 돌아왔다. 찰스 2세는 오랜 외국 생활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현명한 대천황이었다. 찰스 2세는 이제 대국민들의 대화합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며, 과거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찰스 2세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정치적인 보복이 사라져야 하며, 대화와 타협으로 난국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대천황과 대의회가 서로 합심하여 대제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대의회의 대신들은 대천황을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찰스 2세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부황 찰스 1세 사형 사건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찰스 2세는 대인배답게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범에 대해서는 죄를 더 묻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부황 살해에 나선 주모자인 크롬웰만큼은 엄중히 처벌하겠노라고 말했다. 결국 찰스 1세 사형에 서명한 59명 가운데 주모자금주모자였던 9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롬웰의 시체를 봉분 무덤에서 꺼내어 시체를 마구 자르고 오물을 쏟아붇고 심지어는 불에 태워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정치적인 모든 정리는 끝이 났다. 이제 대 영국 제국은 평온을 되찾았고 황궁은 다시 화려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극장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음악가와 미술가와 문학가는 다시 르네상스 시대처럼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 대 영국 제국 : 명예 혁명과 권리 장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