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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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지극히 오래된 시대였기 때문에 정확한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어서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 시대는 허구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구석기 시대에는 유명한 유적지로는 170만년 전 윈난 성(雲南 省)에서 원모인이 발견되었다. 또
신석기 시대에는 유명한 유적지로는 기원전 7000년 경에 마제 석기와 토기와 농경 생활과 목축 등을 시행했던 것으로 씨족 공동체 사회를 이뤘다는 증거가 있다. 허난 특별성(河南 特別省) 안양 시(安陽 市) 부근의 상대 유적지에서 상 제국(商 帝國) 문화와
현재로써는 상 제국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조로 거듭난다. 그 이전의 황조인 하 제국의 경우는 불행히도 뚜렷한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전설상의 황조라고 불린다. 전설상의 역사에서 나오는 8명의 대천황을 삼황오제(三皇五帝)라고 하는데, 삼황은 으뜸 신간으로써 고기잡이를 가르쳐 준 복희(伏羲)와 농사와 의학과 약초의 신간인 신농(神農)과 불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준 수인(燧人)이고, 오제는 중국의 시조로 섬겨지는 황제(黃帝)와 전욱(顓頊)과 제곡(帝嚳)과 요(堯)와 순(舜)이다. 중국 신화에는 이들에 대한 일생이 잘 기록되어 있다.
=== 춘추 전국 시대() ===▼
아무튼 상 제국의 비밀을 풀어준 것은 바로 그 유명한 갑골 문자이다. 그리고 이 갑골 문자는 상 제국의 유적지인 은허(殷墟)를 발견하게 한 결정적인 단서로 자리 잡았다.
▲=== 춘추 전국 시대(春秋 戰國 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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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 제국(大秦 帝國) ===
드디어 중국에서 첫 번째로 대제국을 세워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영정(嬴政)은 춘추 전국 시대를 종결시킨다. 그리고 수도를
아무튼 영정은 우선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종전에 시행했던 봉건 제도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군현 제도를 채택한다. 이 군현 제도는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의 권력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데 한 몫을 했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군현 제도는 황권 강화에 큰 몫을 하였고, 덕분에 지방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사실 영정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바로 대천황을 따르는 대승상인 이사(李斯)였고, 이사는 엄격한 법과 형벌로 대제국을 다스려야 한다는 법가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사는 영정에게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의 권력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영정에게 한 계책을 상주했고 영정은 이사의 말대로 따라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을 수도로 불렀다. 그렇지만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도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정은 이사의 계책에 따라서 그들에게 편지로써 이런 말을 전했다.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자신의 대신으로 충성을 맹세하라고 하는 한편, 대영주들의 권리는 인정하여 그들이 다스리는 지방에는 간섭하지 않고 다스릴 수 있게 자치권을 인정해 준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결국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영정의 속임수에 넘어가 모두 수도로 모이게 된다.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이 모두 수도로 모이자, 지방의 권력자는 텅텅 자리가 비게 되었고, 물론 이 자리는 영정을 섬기는 대신들이 감쪽같이 대영주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수도로 올라온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고향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계속 수도에만 있어야 했으며,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영정에 의해서 반역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정을 섬기는 대신들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대천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한지라 아무도 영정에게 대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덕분에 영정은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정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 지원제인 모병제 대신에, 징집제인 부병제를 직접 채택했고, 이렇게 강력해진 군대를 이용해서 북쪽으로는 북적 제국(北狄 帝國) 중 강력한 힘을 가진 흉노 제국(匈奴 帝國)과 오환 제국(烏桓 帝國) 등을 토벌하여 국경을 튼튼히 하고, 남쪽으로는 남만 제국(南蠻 帝國)에 해당하는 지금의 광둥 광역성(廣東 廣域省) 부근까지 영토를 넓혀 방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대천황의 권위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자신이 거주하려는 황궁인 아방궁(阿房宮) 등을 포함해서 화려한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대진 제국 때 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만리장성은 대진 제국 이전 시기에도 지어져 있었다. 다만 영정은 따로따로 흩어진 만리장성들을 거대한 장성으로 만들고자 보수 및 확장공사를 감행했을 뿐이다.) 만리장성은 자그마치 2700km의 길이에 이르러 인간 족이 이룩한 최대의 공사로 손꼽히고 있으며, 아울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는 한편 영정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높여갔고, 경제적으로 대진 제국을 발전시키고자 지방과 지방간의 무역을 끊임없이 시행해 나갔다. 황허 강(黃河 江)에서부터 창 강(長 江)까지의 사이에 있는 지역에 많은 대운하를 만들어 지역 교류를 원활하게 했고, 그 결과 황허 강 북부와 창 강 남부의 특산물들이 서로 교환되어가면서 중국의 문물들이 다양하게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영정은 문화와 문자와 생활 등 실제로 중국을 ‘한 개의 대제국’으로 통일한 인물로 받들어진다. 영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문자의 통일이었고, 이는 기원전 1200년 경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한 한자는 각 지방마다 다르게 변천하여 쓰고 읽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읽는 법과 뜻을 모두 한 개로 통일하여 비로소 중국에 통일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각 지방마다 다르게 쓰이는 계량과 측량의 단위도 통일했고, 글씨를 대나무에 써 오던 것을 처음으로 붓과 먹으로 비단 위에 쓰게 필기법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마차의 두 바퀴 축의 길이가 중국 전 지역에서 같게 통일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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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정은 지나친 독재 정치로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분서갱유란 바로 서적들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땅 속에 묻는다는 말이다. 즉 법가 사상이나 농업이나 상업이나 의학 등 실용적인 책을 제외한 나머지 유가 사상이나 맹가 사상 등 법가 사상에 반대하는 책들은 대천황의 명령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말았고, 대천황의 공포 정치에 크게 반발한 유생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땅 속에 묻어버렸는데 그 수가 460명에 달했다고 한다. 영정의 무자비한 독재 정치로 인해서 급기야는 백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영정이 죽고 난 후 대천황의 자리는 영정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영호해(嬴胡亥)가 차지했다. 그러나 영호해는 환관인 조고(趙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조고는 권력욕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진 제국은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각 지방에서 대천황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특히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중심으로 한 큰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대진 제국에 대항해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장수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떨친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 대한 제국(大漢 帝國) ===
==== 전기 ====
대한 제국의 1대 대천황이 되는 유방(劉邦)은 본래 한 국가를 다스리고 있는 평범한 대영주였다. 하지만 대진 제국이 멸망하여 각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세상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국 유방은 자신의 군대를 이용하여 세상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유방은 자신의 최대 천적이자 대초 제국(大楚 帝國)을 건설하려던 항우(項羽)를 무찌르는 데 성공하였고, 드디어 세상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유방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평민 출신으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방은 대제국을 세우고 나서 평민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고, 그렇게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책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는 한편 수도를 장안 특별시(長安 特別市)로 옮기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유방은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난 일을 많이 했다.
그 증거로 주 제국은 봉건 제도를 택하였으나 지방 제후를 손아귀에 넣지 못해서 망했고, 대진 제국은 강력한 군현 제도를 시행했으나 강대한 대천황인 영정이 죽고 나서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방은 주 제국의 봉건 제도와 대진 제국의 군현 제도를 적절히 혼합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곧 군국제로 불려졌다. 중앙 지방에는 황족과 대천황을 중심으로 하고, 변두리 지방에 있는 제후국을 두어 왕족과 공신들을
이후 유방이 죽고 나서 여러 번 대천황의 자리가 바뀌어져 혼란이 찾아왔다. 하지만 유방이 평소에 다져놓은 기초는 매우 튼튼했기에 대제국은 쉽게 멸망하지 않았으며, 7대 대천황인 유철(劉徹) 시기에는 더욱 성장한 대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유철은 자신의 권위를 노리는 자들이 함부로 반항하지 못하게 길들이기로 결정했다. 하늘과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진대도 대천황의 자리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것을 말했고 또한 대천황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충성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충성과 효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며 폭력을 배척하라는 유가 사상가인 공구의 가르침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드디어 유교가 대천황에 의해서 다시 국교로 삼아지며 유가 사상을 널리 가르칠 학교가 필요가 생겼다. 박사들과 석사들 같은 똑똑한 사람들을 두어 유가 사상을 연구하게 하고 공구의 가르침을 모든
그런데 황실의 외척인 왕망(王莽)이라는 자가 등장한다. 왕망은 평소에 성격이 매우 깐깐했고,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상관없이 마치 대천황처럼 행세해서 자신의 뜻에 반대를 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시켰거나 시골로 내쫓아버렸다. 게다가 당시 대한 제국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과거 대천황인 유철이 엄청난 전쟁과 원정으로 대제국의 기둥을 엄청 흔들어 놓았다. 날로 세금이 늘어나 백성들은 곤경에 빠졌고,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대제국이 결국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을 정도였다.
이때를 틈타서 왕망은 당시 14대 대천황인 유간(劉衎)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딸인 왕씨를 유간에게 보내어 결혼하게 했다. 이렇게 왕망은 서서히 대제국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기 시작했다. 평소 왕망은 매사에 엄격하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자신을 해치려 했던 대천황의 어머니까지도 역적으로 몰아 사형시킨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천황은 왕망을 암살시키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망에게 그 소식이 전해져, 결국 왕망은 인정사정없이 대천황을 독살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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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
25년에 이러한 분열 상황을 없애고 대한 제국의 혈통인 유수(劉秀)가 대제국을 건립하고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유수는 저주받은 장안 특별시를 버리고 과감히 수도를 뤄양 특별시(洛陽 特別市)로 옮기며 경제 발전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다. 유수는 일단 강력한 중앙 집권제를 이룩하여 대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국방력도 크게 강화되어 당시 서양 세계에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대 로마 제국과 맞먹을 정도로 영토가 매우 거대해졌다. 그리고 대 로마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경제가 매우 발전하여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유수는 문화 발전에도 큰 몫을 해냈으며, 모든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제 같은 말을 쓰기 시작했고, 문자까지 통일하여 한자라는 같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명 한문화(漢文化)를 발달시켜 오늘날의 중국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희대의 발명품인 종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황실 고위 관리인 채륜(蔡倫)이 나무와 갖은 재료들을 활용해서 만든 것이 종이인 것이다. 종이는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중국의 발명품에 속하게 되었다. 종이의 발명은 문화 발전에 큰 몫을 했는데, 기록을 위한 재료가 비로소 해결된 까닭이었다. 물론 서양 세계로까지 널리 퍼져 인간 족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당연하다.
=== 삼국 시대(三國 時代) ===
한편 황궁은 대천황을 보좌하는 열 명의 내시들이 대제국을 말아먹고 있었다. 이들은 십상시(十常侍)로 불리었고 그 당시 대천황인 유굉(劉宏)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이 권력을 멋대로 행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십상시에 대항해서 노란 두건을 쓴 도적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는 반란이다. 황건적의 대장인 장각(張角)은 아우인 장보(張寶)와 장량(張梁)과 힘을 합쳐 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만의 황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백성들은 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건적이 황국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황건적은 대한 제국을 보호하려는 군주들에 의해서 결국 무장 진압되고 말았고 장각과 장보와 장량도 전사하고 말자, 황건적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황건적들을 멸망시킨 세력들이 대천황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다른 군주들이 대천황의 자리를 넘보고 있을 정도라면, 그만큼 대한 제국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증거다. 게다가 기존의 대천황인 유굉이 사망하고 그의 첫 번째 아들인 유변(劉辯)이 어린 나이에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결국 황실 내시들이었던 십상시들이 어린 대천황을 깔보며 자신들의 권위를 강력히 하기 위해서 제대로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그 당시 대천황의 대신이요 대천후의 오빠이자 대사마였던 하진(何進)을 십상시들이 몰래 암살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십상시들의 악행에 참다못해 대제국을 보호하려는 군주들에 의해서 십상시들은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대천황과 황족들은 이 난리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황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천황 일족들 앞에 나타난 어떤 군주가 다가오더니 대천황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대천황과 황족들을 납치해버렸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군주는 동탁(董卓)이라는 자였으며, 본래 이민족 출신의 장군이었으나 대한 제국이 힘을 잃어갈 무렵 권력욕이 제대로 발동해서 결국 때를 보다가 대천황과 황족들을 납치하고는 다시 수도인 뤄양 특별시로 이끌고 가 버린다.
동탁은 본래 권력욕이 상당히 심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증거로 자신이 대승상의 자리에 오르자 멋대로 대천황을 갈아 치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대신들이 모조리 반대했지만, 동탁에게는 당시 가장 뛰어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여포(呂布)라는 부하가 있었기 때문에 겁도 없이 대신들의 의견도 무시하고 기존의 대천황인 유변을 황좌의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유굉의 두 번째 아들이자 유변의 남동생인 유협(劉協)을 대천황의 자리에 앉혀버렸다. 이렇듯 동탁은 대천황을 갈아치워 버린 이후, 자신에 대해서 반대하는 대신들은 모조리 쫓아내거나 죽여 버렸다. 심지어는 죄 없는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끝내 동탁의 악행에 참다못한 지방의 군주들이 동탁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대천황을 구원하고 자신이 새로운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동탁의 악행은 다른 지방의 군주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반 동탁 연합군을 결성한 자는 조조(曹操)라는 군주였는데, 본래 조조 역시 대천황을 모시는 대신이었지만 동탁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서 반 동탁 연합군을 결성한 것이다. 반 동탁 연합군은 지방의 군주들이 일치단결하여 만든 세력이었고, 세력은 나름 컸지만 사실상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허접한 세력들이었다. 게다가 반 동탁 연합군의 대장은 성격이 우유부단한 원소(袁紹)라는 자가 되었고, 그런 원소는 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렇듯 반 동탁 연합군은 당시 창 강
비록 반 동탁 연합군이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하고 결국 해산되기 일부 직전까지 왔으나, 동탁은 그래도 손견을 포함한 다른 지방의 군주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동탁은 이 일을 해결하고자 자신이 대천황인 양 권력을 또다시 이용하였는데, 바로 대제국의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대제국의 수도는 뤄양 특별시였고, 유수가 저주받은 장안 특별시를 버리고 수도를 새롭게 정했다. 그런 만큼 뤄양 특별시는 상당히 발전된 국제 도시였고, 대신들도 이에 대한 불만 없이 뤄양 특별시에서 평화롭게 잘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동탁은 자신의 세력과 가까운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정하고 대천황을 멋대로 이용해먹기 위해서 결국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뤄양 특별시에 있는 황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을 모두 장안 특별시로 모두 강제 이민을 시켰다. 게다가 동탁은 여포로 하여금 황실 유물을 모조리 도굴하여, 자신의 재물을 늘리는 데에 신경을 썼다.
황폐한 장안 특별시로 강제 이민을 온 황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모두 동탁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동탁은 현재 중국에서 세력이 가장 강력하고 또한 자신의 부하이자 양아들인 여포를 심복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동탁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느님의 소리라고 말했던가, 동탁에게도 곧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바로 제국의 대신이자 황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자인 왕윤(王允)이 동탁을 암살하기 위해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왕윤은 대한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대신이었고, 그런 만큼 애국심이 상당히 강했다. 따라서 동탁 따위가 대천황 폐하를 무시하고 자신이 대천황인 양 행세하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왕윤은 제국을 바로잡고 다시 원래 자신이 모셔왔던 대천황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탁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동탁의 양아들인 여포가 동탁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개념 없는 언행을 자주 일삼자, 결국 동탁은 여포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여포는 동탁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게 되었고, 왕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왕윤은 때가 다가오자, 황궁으로 찾아가 대천황을 알현하였다. 왕윤은 대천황에게 자신이 그 동안 계획했던
결국 대신 왕윤과 여포의 활약으로 대역적 동탁은 사망하고 말았다. 동탁의 시체는 장안 특별시에 있는 큰 광장에 방치되었는데, 장안 특별시의 모든 시민들과 동탁에 의해서 강제로 장안 특별시로 이주를 당한 뤄양 특별시의 모든 시민들은 같이 동탁의 시체를 마구 때리고 오물을 쏟아 붇기까지 했다. 그것마저 모자라 동탁의 옷을 벗겨 그의 배꼽 위에 커다란 촛대를 세워 촛대에 불을 붙였는데, 동탁의 뱃속에 있던 기름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동탁의 시체는 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최종적으로 동탁의 시체는 결국 모든 시민들에 의해서 불태워졌다. 아무튼 이렇게 대역적 동탁을 처단하는 일은 무사히 끝났지만, 동탁의 부하들이었던
=== 대위 제국(大魏 帝國) ===
대위 제국(大魏 帝國)을 건국한 조조의 세 번째 아들인 조비(曹丕)는, 뤄양 특별시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과거 조조는 스스로 대천황이 되는 것을 사양하고 끝까지 대한 제국의 대신이자 대위 제국의
그래도 조비는 아버지인 조조의 뜻을 받들어 민생 안정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비록 자신들의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현명한 대천황답게 백성들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그들이 편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많이 도와주었다. 한편으로는 대오 제국과 대촉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군사력 증강에도 엄청난 힘을 썼다. 그 증거로 조비는 대촉 제국이 잠시 힘을 잃은 사이에, 곧바로 군대를 정비하여 대오 제국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사실 대신들은 조비가 대오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으려고 했었고, 당시 무더운 혹서기 시절이라 군사들이 무더위에 쓰러져 전투력을 많이 상실할 수도 있다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조비는 삼국 통일에만 너무 얽매인 나머지 대신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당시 대장군이었던
이후 조비의 첫 번째 아들인
=== 대오 제국(大吳 帝國) ===
대오 제국(大吳 帝國)을 건국한 손견의 두 번째 아들인 손권(孫權)은, 진예 특별시(建業 特別市)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본래 손권은
그러나 손권은 나이가 든 말년에 노망이 나 버렸고, 자신이 믿고 아껴왔던 대신들조차 모조리 귀양 보내버리거나 사형에 처하는 등 온갖 악행들을 저질렀다. 결국 손권의 뒤를 이은 대천황이 손권의 일곱 번째 아들인 손량(孫亮)이었는데, 지나치게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흠이었다. 본래 손권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인 손등(孫登)에게 대천황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손등이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손권은 남아있는 자식들 중에 대천황의 자리를 줄
=== 대촉 제국(大蜀 帝國) ===
대촉 제국(大蜀 帝國)을 건국한 유비는, 청두 특별시(成都 特別市)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 유비는 대천황의 자리를 계속 거부해왔었는데, 바로 유비는 대한 제국의 충실한 신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한 제국이 비록 대위 제국에 의해서 망해버렸지만, 여전히 유비는 자신은 영원한 대한 제국의 신하라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조비가 유협을 다른 지역으로 내쫓아내고 자신이 대위 제국의 대천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다가, 결국 대신들이 간곡히 상주하여 할 수 없이 유비는 대한 제국의 신하로써 대한 제국을 계승하기 위해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는 한편 유비는 자신의 의형제인 관우를 처형한 대오 제국의
유선은 대천황이 되기에는 좀 불안한 면이 있었는데, 바로 유선은 멍청하며 용기도 없는 겁쟁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실권은 사실상 대승상인 제갈량에게 있었지만, 그래도 과거 유비 대천황을 정성껏 섬긴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대로 유선을 잘 보살피며 정치를 시행한다. 우선 제갈량은 대위 제국의 침입을 막아내며, 한편으로는 험악했던 대오 제국과의 관계 개선에 큰 힘을 썼다. 그리하여 결국 대촉 제국은 다시 대오 제국과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여 대위 제국에 대항할 힘을 갖춘다. 그런데 때마침 대촉 제국의 서남 지역인 남만 제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고, 이 반란을 막기 위해서 드디어 제갈량이 자진하여 출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남만 제국을 평정하고 드디어 대위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 대진 제국(大晉 帝國) ===
사마염(司馬炎)이 삼국 시대를 종결시킴으로써, 다시 통일 황조가 열렸다. 사마염은 수도를 뤄양 특별시로 정했고, 과거 삼국 시대와는 다르게 지방 자치제를 인정하지 않고 중앙 집권체제를 강력히 밀어붙였다. 이렇게 중앙 집권체제를 강력히 정비하여 대천황의 힘을 강력하게 키워나갔고, 지방 군주들이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첩자들을 보내 지방 군주들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마염의 정책은 결국 도리어 자신의 아들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데 일조해버렸고, 후에 대진 제국은 팔황의 난(八皇之亂)이라고 불리는 반란들을 맞이하게 된다.
어쨌든 사마염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겨버렸는데, 상황이 사마염의 두 번째 아들인 사마충(司馬衷)이 대천황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마염은 첫 번째 아들인 사마궤(司馬軌)에게 대천황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사마궤가 일찍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충은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예상대로 사마충이 대천황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백성들의 삶도 매우 좋지 못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사마충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자 "쌀이 없으면 어째서
===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 ===
== 중세 ==
=== 대수 제국(大隋 帝國) ===
대수 제국의 1대 대천황인 양견()이 드디어 혼란했던 남•북조 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모조리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양견은 우선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정했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그 증거로 양견은 중국에서 첫 번째로 과거 제도를 시행한 장본인이 되었고, 관리를 채용함에 있어서 실력 위주로 선발하여 백성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는다. 이 과거 제도는 대청 제국 시대까지 계속 채택된 인재 등용 제도로 거듭났다. 양견이 왜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는가 하면, 이제 오랜 전란으로 어지러워진 대제국을 새로운 제도로 정비하여 훌륭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대제국을 크게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양견은 대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대제국의 방벽을 든든히 하였으며, 아울러 군사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또한 대천황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서 황궁을 크게 새로 지었으며,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양견이 이렇게 파격적인 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불만이 매우 컸으며 최후에는 결국 동이 제국() 중 한 제국인 고구려 제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대천황의 권위를 잃었다. 게다라 양견을 노리는 어떤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양견을 노리고 있는 사람은 양견의 두 번째 아들인 양광()이라는 자였다! 양광은 평소 부황인 양견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때마침 양견이 고구려
드디어 양광은 612년에 고구려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무려 11338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모두 총출동시켰다.
=== 대당 제국(大唐 帝國) ===
==== 전기 ====
대당 제국의 1대 대천황인 이연(李淵)은 원래 대수 제국의 지방 절도사를 겸임하고 있었으나, 대수 제국이 자주 고구려 제국을 포함한 이민족 국가들을 침범함으로써 국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대수 제국은 이연의 반란에 의해서 망해버렸고, 이연은 새로이 대당 제국을 수립하며 수도를 장안 특별시로 정했다. 대당 제국은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번창했고 강대했던 대제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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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당 제국(大唐 帝國) ===
==== 후기 ====
그러나 이융기는 나이가 들어 말년에 노망이 나자,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 5호•16국 시대(五胡•十六國 時代) ===
=== 대송 제국(大宋 帝國) ===
==== 전기 ====
대송 제국의 1대 대천황인 조광윤()은 5호•16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조광윤은 우선 수도를 카이펑 특별시(開封 特別市)로 옮기고 자신은 비록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문치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광윤은 칼에 의한 정치보다는 붓에 의한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선포한 대천황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대송 제국의 군대는 대부분 해체되었으며, 무관들은 문관들보다도 대접을 좋게 받지 못했다. 그리고 종전의 부병제보다는 모병제를 직접 채택함으로써 국방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칭송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부담감 없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실제로 대송 제국은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찬란한 문화가 발달했던 시기이다. 중국의 귀중한 유산들이 거의 대송 제국 때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치주의는 결국 국력의 급격한 쇠퇴를 낳기 시작했다.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자 주변의 이민족들은 대송 제국을 얕잡아보면서 끊임없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특히 변방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보유한 거란 제국()과 여진 제국()과 몽골 제국()의 침입이 극성했다. 이민족들은 대송 제국에 함부로 침략하여 대송 제국으로부터 자꾸만 이익을 챙겨가려고 했다. 이렇게 이민족들이 도발을 자꾸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송 제국은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이민족들에게 금은보화를 갖다 바쳐 전쟁을 면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평화로만 대제국을 지켜가려는 대송 제국의 모습에, 이민족들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자꾸 대송 제국을 침략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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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대천황과 대천황을 모시는 고위 관리인 진회()라는 자가 악비를 방해하였다. 이들은 악비와는 다르게 화평파에 속하여 전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고, 주전파인 악비를 자꾸만 방해하여 악비가 거의 승리를 맞이했을 무렵 황궁으로 불러들여 악비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악비가 대금 제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마침내 대금 제국의 수도를 눈 앞에 두고 공격하려고 할 때, 마침내 대천황은 진회의 말에 넘어가 악비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이후 악비는 1155년에 진회가 죽고 난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다시 회복되었으며, 1178년에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대제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204년에
=== 대요 제국(大遼 帝國) ===
=== 대금 제국(大金 帝國) ===
== 근세 ==
=== 대원 제국(大元 帝國) ===
대원 제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가장 큰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중국 역사상 이민족 황국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바로 몽골 족이 의해서 다스려지는 황국이었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베이징 특별시()로 정했으며, 몽골 족을 상당히 우대하는 정책을 많이 폈다. 그리고 색목인이라고 해서 눈 색깔이 다른 민족들을 총칭하는 세력들을 그 다음으로 우수하게 대해준다. 색목인이란 한 마디로 한민 족이 아닌 다른 서양 세계의 사람들로 앵글로색슨 족과 게르만 족과 노르만 족 등을 총칭했다. 그 유명한 서양 세계의 사람인 마르코 폴로()도 색목인이었던 덕분에, 대원 제국의 대천황으로부터 엄청난 인정과 보호를 받아가면서 대원 제국에서 근무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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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대명절인 중추절()을 이용해서 몰래 쪽지를 돌려 대원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는 방법을 모색해내기도 했다. 이것을 흔히 중추월병 전략이라고 불리며, 접시 맨 밑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독려하는 종이를 놓고 그 위에 맛있는 떡들을 올려 종이가 대원 제국의 첩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했다.
=== 대명 제국(大明 帝國) ===
대명 제국의 1대 대천황인
하지만 주원장은 황권에 도전하여 대제국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즉 주원장은 모든 대제국의 권력을 대천황 자신으로 통일시켜 대천황의 권력을 매우 강력히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과거 찬란함을 유지했던 대제국들이 결국 반란으로 망하였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주원장은, 대제국을 말아먹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해 나가는 환관들을 억누르는 정책을 많이 썼다. 이 결과 죄 없는 대신들이 많이 처형되었고, 대신들은 주원장의 폭력 정치에 크게 실망하여 더 이상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평민으로 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 대순 제국(大順 帝國) ===
대명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면서까지 대제국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수도는 시안 특별시()로 정했으며, 자신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사형시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썩어가는 대명 제국을 마구 공격하고 있는 여진 족과 연합하여 끝내 대명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 근대 ==
=== 대청 제국(大淸 帝國) ===
여진 족의 군주였던 누르하치()는 대순 제국의 대천황인 이자성을 이용하여 세력을 크게 키워나간다. 그러는 한편 대명 제국이 망하자마자 몰래 자신들만의 황국인 대청 제국을 설립하고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수도 베이징 특별시를 점령한 여진 족들은 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대명 제국의 반역자 이자성을 끝까지 추적하여 마침내 이자성을 붙잡아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대청 제국 역시 대원 제국 때처럼 이민족 황국이었으나, 여진 족은 몽골 족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여진 족은 중국의 전통 민족인 한민 족들을 회유하는 정책들을 많이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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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주공화국 ===
드디어 신해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중화민주공화국의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손문은 우선 수도를
장개석은 중화민주공화국을 더욱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뛰어난 정책을 펼쳤으며, 그 결과 중화민주공화국은 나날이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는 한편 자신의 최대 적이자 국민당의 주적인 공산당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모택동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려는 전략도 시행했다.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군사적으로도 밀렸고 게다가 무기조차 변변치 못해서 국민당이 제대로 공격을 하면 공산당은 완전히 멸망할 것 같았다.
=== 중화인민공화국 ===
국민당이 한창 중국에서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고 있을 무렵, 느닷없이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켜
== 신화적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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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references/>
[[분류: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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