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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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잉글랜드 식민지 시대 ===
처음 대 미국 제국은 독립적인 대제국을 형성한 상태가 아니었다. 즉 대 영국 제국의 식민지로써 대 영국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대 영국 제국은 한정된 영토에 인구가 자꾸만 늘어나자 1620년에 결국 일부 대국민들을 강제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를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교도인들이었고, 당시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이었던 찰스 제임스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인 102명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메이플라워
게다가 대 영국 제국은 대 프랑스 제국과 대 에스파냐 제국 등과의 전쟁으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결국 대 영국 제국은 그 돈을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서 걷게 되었는데, 이 세금은 식민지에서 쓰는 모든 상품들을 대 영국 제국이 도맡아 대는 까닭에 더욱 비싸졌다. 그렇게 되자, 대 영국 제국이 아닌 다른 제국에서 상품을 몰래 사 오는 밀수꾼들이 늘어났고, 이들을 단속하며 식민지 지배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대 영국 제국은 1만 명의 상비군을 두게 되었다. 거기다가 상비군의 유지비를 식민지에 떠맡기자 드디어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대 영국 제국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군대이므로 보호받는 자가 그 비용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뉴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들은 이에 맞서 상비군은 오히려 우리들을 억누르기 위한 군대인 것임을 알아채고 비용을 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는 세금 수입을 늘리고 군대 유지비를 거두기 위해서 1765년 인지
대 영국 제국의 대의원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인지세를 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유인즉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인지세도 내지 않으면서 대 영국 제국의 군대가 식민지를 지켜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포였다. 하지만 벤저민 프랭클린도 이에 되받아쳤고 뉴 잉글랜드 식민지는 대 영국 제국의 전쟁을 위해서 2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수백만 파운드를 지원했다는 일을 상기시켰다. 이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원들은 인지세를 낮출 것을 맹세하고 앞으로 대 영국 제국을 위해서 더욱 힘쓸 것을 요구했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지세를 아예 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비록 벤저민 프랭클린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의 주민들이 같은 대 영국 제국의 대천황 폐하의 백성으로써 세금을 내겠다고는 주장했지만,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는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에 대표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어 정치 참여를 봉쇄시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 영국 제국의 대국민들은 대의회에 그들의 대표인 대의원들을 마음껏 보내면서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는 이러한 기회를 주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대 영국 제국이 뉴 잉글랜드 식민지를 탄압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니까 같은 대제국의 대국민으로써 세금을 내야 한다면, 마땅히 뉴 잉글랜드 식민지도 대 영국 제국의 대의회에 대표를 내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처음에 대 영국 제국의 대의원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듣고 수긍을 했다. 하지만 일부 대의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표를 보내도록 허용을 한다면, 언젠가는 대 영국 제국의 대표보다 그 숫자가 훨씬 많아져 곧 대 영국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지배를 받는 경고 형식의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의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표를 보내지 않기로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인지 조례에 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반대는 대 영국 제국의 상품인 불매 운동으로
결국 인지 조례는 1년 만인 1766년에 폐기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 영국 제국이 뉴 잉글랜드 식민지를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었다. 대 영국 제국은 뉴 잉글랜드 식민지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금을 거두려고 했고, 결국 1767년에 당시 대 영국 제국의
뉴 잉글랜드 식민지 주민들은 대 영국 제국의 유리와 염료와 종이와 차를 절대로 구매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고, 이렇게 새뮤얼
=== 드디어 시작된 충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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