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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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
=== 하•상•주 제국(夏•商•周 帝國) ===
 
이 시대는 지극히 오래된 시대였기 때문에 정확한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유물이나 유적 등이 발굴되어서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 시대는 허구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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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진 제국(大秦 帝國) ===
 
드디어 중국에서 첫 번째로 대제국을 세워서 대천황의 자리에 오른 영정(嬴政)은 춘추 전국 시대를 종결시킨다. 그리고 수도를 함양 특별시(咸陽 特別市)로 정하여 대도시로 발전시키는 한편, 자신이 대천왕보다왕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직위가 높은 대천황의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대천황이라는 직위는 대신들이 영정에게 바친 매우 높은 직위였다. 도교 사상에서 자세히 나오지만, 대태황태황(泰皇)과 대천황황제(大天)과 대지황지황(地皇)을 바탕으로 한 직위 중 가장 높은 직위를 대신들이 조사하여 영정에게 바친 것이었다. 처음에 대신들은 영정에게 대태황이 가장 높은 직위인 것을 알고 영정에게 이 칭호를 바치려고 했으나, 정작 영정은 대천황이라는황제이라는 칭호가 맘에 들어 결국 이 대천황이라는황제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튼 영정은 우선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종전에 시행했던 봉건 제도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군현 제도를 채택한다. 이 군현 제도는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의 권력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데 한 몫을 했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군현 제도는 황권 강화에 큰 몫을 하였고, 덕분에 지방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사실 영정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바로 대천황을황제을 따르는 대승상인 이사(李斯)였고, 이사는 엄격한 법과 형벌로 대제국을 다스려야 한다는 법가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사는 영정에게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의 권력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영정에게 한 계책을 상주했고 영정은 이사의 말대로 따라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을 수도로 불렀다. 그렇지만 지방에 있는 대영주들도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정은 이사의 계책에 따라서 그들에게 편지로써 이런 말을 전했다.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자신의 대신으로 충성을 맹세하라고 하는 한편, 대영주들의 권리는 인정하여 그들이 다스리는 지방에는 간섭하지 않고 다스릴 수 있게 자치권을 인정해 준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결국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영정의 속임수에 넘어가 모두 수도로 모이게 된다.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이 모두 수도로 모이자, 지방의 권력자는 텅텅 자리가 비게 되었고, 물론 이 자리는 영정을 섬기는 대신들이 감쪽같이 대영주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수도로 올라온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고향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계속 수도에만 있어야 했으며, 지방의 모든 대영주들은 영정에 의해서 반역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정을 섬기는 대신들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대천황에게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한지라맹세한 지라 아무도 영정에게 대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덕분에 영정은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정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 지원제인 모병제 대신에, 징집제인 부병제를 직접 채택했고, 이렇게 강력해진 군대를 이용해서 북쪽으로는 북적 제국(北狄 帝國) 중 강력한 힘을 가진 흉노 제국(匈奴 帝國)과 오환 제국(烏桓 帝國) 등을 토벌하여 국경을 튼튼히 하고, 남쪽으로는 남만 제국(南蠻 帝國)에 해당하는 지금의 광둥 광역성(廣東 廣域省) 부근까지 영토를 넓혀 방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대천황의황제의 권위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자신이 거주하려는 황궁인 아방궁(阿房宮) 등을 포함해서 화려한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대진 제국 때 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만리장성은 대진 제국 이전 시기에도 지어져 있었다. 다만 영정은 따로따로 흩어진 만리장성들을 거대한 장성으로 만들고자 보수 및 확장공사를 감행했을 뿐이다.) 만리장성은 자그마치 2700km의 길이에 이르러 인간 족이 이룩한 최대의 공사로 손꼽히고 있으며, 아울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는 한편 영정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높여갔고, 경제적으로 대진 제국을 발전시키고자 지방과 지방간의 무역을 끊임없이 시행해 나갔다. 황허 강(黃河 江)에서부터 창 강(長 江)까지의 사이에 있는 지역에 많은 대운하를 만들어 지역 교류를 원활하게 했고, 그 결과 황허 강 북부와 창 강 남부의 특산물들이 서로 교환되어가면서 중국의 문물들이 다양하게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영정은 문화와 문자와 생활 등 실제로 중국을 ‘한 개의 대제국’으로제국’으로 통일한 인물로 받들어진다. 영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문자의 통일이었고, 이는 기원전 1200년 경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한 한자는 각 지방마다 다르게 변천하여 쓰고 읽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읽는 법과 뜻을 모두 한 개로 통일하여 비로소 중국에 통일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각 지방마다 다르게 쓰이는 계량과 측량의 단위도 통일했고, 글씨를 대나무에 써 오던 것을 처음으로 붓과 먹으로 비단 위에 쓰게 필기법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마차의 두 바퀴 축의 길이가 중국 전 지역에서 같게 통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정은 지나친 독재 정치로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분서갱유란 바로 서적들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땅 속에 묻는다는 말이다. 즉 법가 사상이나 농업이나 상업이나 의학 등 실용적인 책을 제외한 나머지 유가 사상이나 맹가 사상 등 법가 사상에 반대하는 책들은 대천황의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말았고, 대천황의황제의 공포 정치에 크게 반발한 유생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땅 속에 묻어버렸는데 그 수가 460명에46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영정의 무자비한 독재 정치로 인해서 급기야는 백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영정이 죽고 난 후 대천황의황제의 자리는 영정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영호해(嬴胡亥)가 차지했다. 그러나 영호해는 환관인 조고(趙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조고는 권력욕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진 제국은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각 지방에서 대천황에황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특히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을 중심으로 한 큰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대진 제국에 대항해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장수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떨친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 대한전한 제국(大漢 帝國) ===
==== 전기 ====
 
대한 제국의 1대 대천황이황제가 되는 유방(劉邦)은 본래 한 국가를 다스리고 있는 평범한 대영주였다. 하지만 대진 제국이 멸망하여 각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세상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국 유방은 자신의 군대를 이용하여 세상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유방은 자신의 최대 천적이자 대초 제국(楚 帝國)을 건설하려던 항우(項羽)를 무찌르는 데 성공하였고, 드디어 세상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참고로 유방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평민 출신으로 대천황의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방은 대제국을제국을 세우고 나서 평민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고, 그렇게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책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는 한편 수도를 장안 특별시(長安 特別市)로 옮기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유방은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난 일을 많이 했다.
 
그 증거로 주 제국은 봉건 제도를 택하였으나 지방 제후를 손아귀에 넣지 못해서 망했고, 대진 제국은 강력한 군현 제도를 시행했으나 강대한 대천황인 영정이 죽고 나서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방은 주 제국의 봉건 제도와 대진 제국의 군현 제도를 적절히 혼합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곧 군국제로 불려졌다. 중앙 지방에는 황족과 대천황을황제을 중심으로 하고, 변두리 지방에 있는 제후국을 두어 왕족과 공신들을 대천왕으로왕으로 앉히고, 가까운 곳에는 관리를 두어 중앙 집권제도를 완벽히 갖추었다.
 
이후 유방이 죽고 나서 여러 번 대천황의황제의 자리가 바뀌어져 혼란이 찾아왔다. 하지만 유방이 평소에 다져놓은 기초는 매우 튼튼했기에 대제국은제국은 쉽게 멸망하지 않았으며, 7대 대천황인황제인 유철(劉徹) 시기에는 더욱 성장한 대제국으로제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유철은 자신의 권위를 노리는 자들이 함부로 반항하지 못하게 길들이기로 결정했다. 하늘과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진대도 대천황의황제의 자리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것을 말했고 또한 대천황을황제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충성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충성과 효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며 폭력을 배척하라는 유가 사상가인 공구의 가르침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드디어 유교가 대천황에황제에 의해서 다시 국교로 삼아지며 유가 사상을 널리 가르칠 학교가 필요가 생겼다. 박사들과 석사들 같은 똑똑한 사람들을 두어 유가 사상을 연구하게 하고 공구의 가르침을 모든 대천왕들과왕들과 백성들의 머리에 뿌리박히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유교는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실의 외척인 왕망(王莽)이라는 자가 등장한다. 왕망은 평소에 성격이 매우 깐깐했고,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상관없이 마치 대천황처럼황제처럼 행세해서 자신의 뜻에 반대를 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시켰거나 시골로 내쫓아버렸다. 게다가 당시 대한 제국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과거 대천황인황제인 유철이 엄청난 전쟁과 원정으로 대제국의제국의 기둥을 엄청 흔들어 놓았다. 날로 세금이 늘어나 백성들은 곤경에 빠졌고,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대제국이 결국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을 정도였다.
 
이때를 틈타서 왕망은 당시 14대 대천황인황제인 유간(劉衎)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딸인 왕씨를 유간에게 보내어 결혼하게 했다. 이렇게 왕망은 서서히 대제국의제국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기 시작했다. 평소 왕망은 매사에 엄격하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자신을 해치려 했던 대천황의황제의 어머니까지도 역적으로 몰아 사형시킨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천황은황제은 왕망을 암살시키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망에게 그 소식이 전해져, 결국 왕망은 인정사정없이 대천황을황제을 독살해버리고 말았다!
 
=== 대신 제국(大新 帝國) ===
 
드디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일으킨 왕망이 대천황의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그대로 두었고, 왕망은 이렇게 어지러운 대제국을제국을 바로잡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대제국이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방의 대영주들이 중앙 정부가 상당히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제멋대로 영토를 늘리고 권세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하여 왕망은 지방의 대영주들의 영토를 강제로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지방의 대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강력한 중앙 집권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왕망은 전 국토를 완전히 국유화하는 데 성공하였고, 영토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인덕을 쌓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왕망은 지방의 대영주들이 감히 대천황에게황제에게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유가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탄탄한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노예 상호간의 매매를 절대적으로 금지시켜 인권을 중요시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개혁은 지방의 대영주들과 백성들에게 큰 만족을 주지 못했는데.
 
이렇게 왕망이 엄청난 노력을 통하여 과격한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왕망 자신도 평소 자신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귀족들에게 암살당했으며, 대신 제국은 건국한 지 불과 15년 만인 23년에 망하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중국은 한동안 대권을 노리는 귀족들의 전쟁터로 변모해버리고 말았고, 다시 분열된 제국들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을 종결시키고 다시 통일 대제국을 만들고자 하는 무리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 대한후한 제국(大漢 帝國) ===
==== 후기 ====
 
25년에 이러한 분열 상황을 없애고 대한 제국의 혈통인 유수(劉秀)가 대제국을 건립하고 대천황의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수는 저주받은 장안 특별시를 버리고 과감히 수도를 뤄양 특별시(洛陽 特別市)로 옮기며 경제 발전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다. 유수는 일단 강력한 중앙 집권제를 이룩하여 대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국방력도 크게 강화되어 당시 서양 세계에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는 대 로마 제국과 맞먹을 정도로 영토가 매우 거대해졌다. 그리고 대 로마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경제가 매우 발전하여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유수는 문화 발전에도 큰 몫을 해냈으며, 모든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제 같은 말을 쓰기 시작했고, 문자까지 통일하여 한자라는 같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명 한문화(漢文化)를 발달시켜 오늘날의 중국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희대의 발명품인 종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황실 고위 관리인 채륜(蔡倫)이 나무와 갖은 재료들을 활용해서 만든 것이 종이인 것이다. 종이는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중국의 발명품에 속하게 되었다. 종이의 발명은 문화 발전에 큰 몫을 했는데, 기록을 위한 재료가 비로소 해결된 까닭이었다. 물론 서양 세계로까지 널리 퍼져 인간 족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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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시대(三國 時代) ===
 
한편 황궁은 대천황을황제을 보좌하는 열 명의 내시들이 대제국을제국을 말아먹고 있었다. 이들은 십상시(十常侍)로 불리었고 그 당시 대천황인황제인 유굉(劉宏)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이 권력을 멋대로 행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십상시에 대항해서 노란 두건을 쓴 도적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는 반란이다. 황건적의 대장인 장각(張角)은 아우인 장보(張寶)와 장량(張梁)과 힘을 합쳐 대한후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만의 황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백성들은 대한후한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건적이 황국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황건적은 대한후한 제국을 보호하려는 군주들에 의해서 결국 무장 진압되고 말았고 장각과 장보와 장량도 전사하고 말자, 황건적의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황건적들을 멸망시킨 세력들이 대천황의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다른 군주들이 대천황의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을 정도라면, 그만큼 대한후한 제국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증거다. 게다가 기존의 대천황인황제인 유굉이 사망하고 그의 첫 번째 아들인 유변(劉辯)이 어린 나이에 대천황의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결국 황실 내시들이었던 십상시들이 어린 대천황을황제을 깔보며 자신들의 권위를 강력히 하기 위해서 제대로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그 당시 대천황의황제의 대신이요 대천후의태후의 오빠이자 대사마였던 하진(何進)을 십상시들이 몰래 암살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십상시들의 악행에 참다못해 대제국을제국을 보호하려는 군주들에 의해서 십상시들은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대천황과황제과 황족들은 이 난리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황궁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천황황제 일족들 앞에 나타난 어떤 군주가 다가오더니 대천황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대천황과황제와 황족들을 납치해버렸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군주는 동탁(董卓)이라는 자였으며, 본래 이민족 출신의 장군이었으나 대한후한 제국이 힘을 잃어갈 무렵 권력욕이 제대로 발동해서 결국 때를 보다가 대천황과황제과 황족들을 납치하고는 다시 수도인 뤄양 특별시로 이끌고 가 버린다.
 
동탁은 본래 권력욕이 상당히 심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증거로 자신이 대승상의 자리에 오르자 멋대로 대천황을황제을 갈아 치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대신들이 모조리 반대했지만, 동탁에게는 당시 가장 뛰어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여포(呂布)라는 부하가 있었기 때문에 겁도 없이 대신들의 의견도 무시하고 기존의 대천황인 유변을 황좌의황제의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유굉의 두 번째 아들이자 유변의 남동생인 유협(劉協)을 대천황의황제의 자리에 앉혀버렸다. 이렇듯 동탁은 대천황을황제을 갈아치워 버린 이후, 자신에 대해서 반대하는 대신들은 모조리 쫓아내거나 죽여 버렸다. 심지어는 죄 없는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끝내 동탁의 악행에 참다못한 지방의 군주들이 동탁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대천황을황제을 구원하고 자신이 새로운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동탁의 악행은 다른 지방의 군주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반 동탁 연합군을 결성한 자는 조조(曹操)라는 군주였는데, 본래 조조 역시 대천황을황제을 모시는 대신이었지만 동탁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서 반 동탁 연합군을 결성한 것이다. 반 동탁 연합군은 지방의 군주들이 일치단결하여 만든 세력이었고, 세력은 나름 컸지만 사실상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허접한 세력들이었다. 게다가 반 동탁 연합군의 대장은 성격이 우유부단한 원소(袁紹)라는 자가 되었고, 그런 원소는 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렇듯 반 동탁 연합군은 당시 창 강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군주인 손견(孫堅)이라는 자를 선두로 보내어 동탁이 있는 뤄양 특별시로 출격했다. 손견은 동탁의 부하 장수들을 전사시키며 뛰어난 능력으로 거의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견을 질투하는 반 동탁 연합군들의 군주들의 계략에 의해, 손견에게 군량을 지급해 주지 않았고 끝내 손견의 군대는 군량이 없어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손견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반 동탁 연합군의 본부를 습격하여 연합군에 소속된 군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어 했으나, 부하 장수들의 만류로 참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반 동탁 연합군은 서로 믿지 못하여,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비록 반 동탁 연합군이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하고 결국 해산되기 일부 직전까지 왔으나, 동탁은 그래도 손견을 포함한 다른 지방의 군주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동탁은 이 일을 해결하고자 자신이 대천황인 양 권력을 또다시 이용하였는데, 바로 대제국의제국의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대제국의제국의 수도는 뤄양 특별시였고, 유수가 저주받은 장안 특별시를 버리고 수도를 새롭게 정했다. 그런 만큼 뤄양 특별시는 상당히 발전된 국제 도시였고, 대신들도 이에 대한 불만 없이 뤄양 특별시에서 평화롭게 잘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동탁은 자신의 세력과 가까운 장안 특별시에 수도를 정하고 대천황을 멋대로 이용해먹기 위해서 결국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뤄양 특별시에 있는 황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을 모두 장안 특별시로 모두 강제 이민을 시켰다. 게다가 동탁은 여포로 하여금 황실 유물을 모조리 도굴하여, 자신의 재물을 늘리는 데에 신경을 썼다.
 
황폐한 장안 특별시로 강제 이민을 온 황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모두 동탁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동탁은 현재 중국에서 세력이 가장 강력하고 또한 자신의 부하이자 양아들인 여포를 심복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동탁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느님의 소리라고 말했던가, 동탁에게도 곧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바로 제국의 대신이자 황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자인 왕윤(王允)이 동탁을 암살하기 위해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왕윤은 대한후한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대신이었고, 그런 만큼 애국심이 상당히 강했다. 따라서 동탁 따위가 대천황황제 폐하를 무시하고 자신이 대천황인황제인 양 행세하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왕윤은 제국을 바로잡고 다시 원래 자신이 모셔왔던 대천황을황제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탁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동탁의 양아들인 여포가 동탁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개념 없는 언행을 자주 일삼자, 결국 동탁은 여포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여포는 동탁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게 되었고, 왕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왕윤은 때가 다가오자, 황궁으로 찾아가 대천황을황제을 알현하였다. 왕윤은 대천황에게황제에게 자신이 그 동안 계획했던 계책을 보고하였고, 대천황을황제를 위해서 동탁에게 가짜로 대천황의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조서를 받아내었고, 불안에 휩싸인 대천황을황제을 안심시켜 꼭 대천황황제 폐하가 다시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도와준다고 약속하였다. 그 계책이란 바로 동탁에게 대천황의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거짓 조서를 작성하여 동탁의 마음을 들뜨게 한 뒤, 동탁이 황궁에 발을 내딛는 순간 즉시 암살해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대천황황제 역시 매우 만족해하며 왕윤에게 그 계책을 시행할 것을 허락했다. 한편 동탁은 왕윤의 계책에 빠져 결국 자기를 따르는 모든 대신들을 이끌고 즐거운 마음으로 황궁 앞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동탁을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죽음뿐이었으니, 바로 그의 양아들 여포가 동탁을 향해서 칼을 휘둘러 동탁의 목을 베어버렸다!
 
결국 대신 왕윤과 여포의 활약으로 대역적 동탁은 사망하고 말았다. 동탁의 시체는 장안 특별시에 있는 큰 광장에 방치되었는데, 장안 특별시의 모든 시민들과 동탁에 의해서 강제로 장안 특별시로 이주를 당한 뤄양 특별시의 모든 시민들은 같이 동탁의 시체를 마구 때리고 오물을 쏟아 붇기까지 했다. 그것마저 모자라 동탁의 옷을 벗겨 그의 배꼽 위에 커다란 촛대를 세워 촛대에 불을 붙였는데, 동탁의 뱃속에 있던 기름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동탁의 시체는 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최종적으로 동탁의 시체는 결국 모든 시민들에 의해서 불태워졌다. 아무튼 이렇게 대역적 동탁을 처단하는 일은 무사히 끝났지만, 동탁의 부하들이었던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일행이 몰래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대위 제국(大魏 帝國) ===
 
대위 제국(大魏 帝國)을 건국한 조조의 세 번째 아들인 조비(曹丕)는, 뤄양 특별시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대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과거 조조는 스스로 대천황이 되는 것을 사양하고 끝까지 대한 제국의 대신이자 대위 제국의 대천왕으로 남아서 유협 대천황을 잘 보살피다가 사망했으나, 세 번째 아들인 조비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권력욕이 매우 심했고, 결국 대한 제국의 마지막 대천황인 유협을 황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황좌에 앉음으로써 새로운 대제국의 대천황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조조에게는 태조 무대천황(太祖 武大天皇)으로 추증하였다. 조비는 대제국을 세우면서 자신들에게 반발했던 세력들을 숙청해나가기 시작한다. 심지어 조비는 자신들의 형제들조차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빼앗아버리거나 몰래 암살시켜버리는 등 악행을 저지르면서까지 대제국을 위해서 발전을 시켜나간다. 특히 조조의 네 번째 아들인 조창(曹彰)에게는 자신의 황궁으로 강제로 끌고 와서 그의 군대를 모조리 몰수하여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키며 그를 시골로 내쫓았으며,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조식(曺植)에게는 자신의 황궁으로 강제로 끌고 와서 시를 여러 편 짓게 했으며 그가 자신이 내세운 조건에 맞게 시를 잘 지어내자 그의 벼슬을 모조리 빼앗고 시골로 내쫓았으며, 조조의 여섯 번째 아들인 조웅(曹熊)에게는 겁을 주어 그가 결국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 조조에게 끔찍이 충성을 다 했던 신하들이라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처형시키거나 혹은 시골로 내쫓아버렸다.
 
그래도 조비는 아버지인 조조의 뜻을 받들어 민생 안정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비록 자신들의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현명한 대천황답게 백성들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그들이 편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많이 도와주었다. 한편으로는 대오 제국과 대촉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군사력 증강에도 엄청난 힘을 썼다. 그 증거로 조비는 대촉 제국이 잠시 힘을 잃은 사이에, 곧바로 군대를 정비하여 대오 제국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사실 대신들은 조비가 대오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으려고 했었고, 당시 무더운 혹서기 시절이라 군사들이 무더위에 쓰러져 전투력을 많이 상실할 수도 있다는 충고를 했다. 하지만 조비는 삼국 통일에만 너무 얽매인 나머지 대신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당시 대장군이었던 사마의(司馬懿)에게 대제국을 맡겨달라는 부탁을 하고, 자신은 곧바로 대오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군대를 출동시킨다. 그렇지만 군사력을 제외하고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모두 대오 제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나갔다. 더군다나 대오 제국들의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강력히 지켜내자, 조비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내고 후회하면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의 휴우증 때문인지 조비는 결국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